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알기가 어렵다. 인간은 제각기 누구나 자연의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시도인데도, 그런 인간들을 총으로 대량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더는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 모두를 제각기 단 한 방의 총알로 완전히 세상 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오로지 단 한 번 이렇게 교차하는 지점, 무슨 일이 있어도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유일무이하고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그런 까닭에 제각기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숭고하며, 그런 까닭에 제각기 인간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는 한 경이롭고 주목받아 마땅하다.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정신이 형태를 갖추고,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피조물이 고통을 겪고, 제각기 모든 인간에게서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p.7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어린 시절은 내 주변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부모님은 나를 당혹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셨고, 누이들은 완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정신은 깨어나면서 익숙한 감정들과 기쁨들을 변질시키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를 잃었고 숲은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세상은 낡은 물건들을 바겐세일 하듯 맥없이, 매력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의 나무에서 잎새들이 그런 식으로 떨어진다. 나무는 그걸 느끼지 못한다. 비나 햇살이나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나무 안에서 생명은 가장 좁고 가장 내밀한 곳으로 서서히 옴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나무는 기다린다.---p.93
종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펼치자 거기에 몇 마디 쓰여 있는 게 눈에 뜨였다. 흘낏 그 글을 바라보던 내 눈길이 한 낱말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가 깜짝 놀라 그 글을 읽는 동안, 내 심장은 혹한을 만난 듯 운명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나는 그 구절을 여러 번 읽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나와 데미안 말고는 그 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내 그림을 받아 보았다. 그는 내 그림을 이해했고, 내가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아브락사스란 대체 무슨 뜻일까? 그 구절이 무엇보다도 신경 쓰였다. 나는 그 낱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읽어 본 적도 없었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p.127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아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상(神像)이나 성스러운 가면처럼 보였다. 반은 남자 같기도 했고 반은 여자 같기도 했으며, 나이를 알 수 없었고, 의지가 강하면서도 몽상적으로 보였고, 경직되었으면서도 은밀히 생기에 넘쳤다. 그 얼굴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것이었고 나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닮았는데, 누구를 닮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초상은 한동안 내 모든 생각을 따라다녔으며 나의 삶을 함께했다. 나는 그 그림을 서랍에 숨겨 두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훔쳐보고 나를 놀리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작은 방에 혼자 있게 되는 즉시 그림을 꺼내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이면 침대 위 내 맞은편 벽에 핀으로 꽂아 놓고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침이면 내 시선이 맨 먼저 그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