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1957년 서독 정부 학술 교류처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 같은 해부터 4년간 뮌헨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듬해부터 4년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1964~1999년까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를 맡고 있으며 한국 펜 번역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여정』,『관계』,『안행』(공저),『바람과 그림자』『, 종이꽃』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게오르크 트라클의『귀향자의 노래』, 헤르만 헤세의『헤세의 명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막스 프리슈의『 호모 파버』,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공포의 전율』 등이 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늘을 해시계 위에 내리시고 벌에는 바람을 일게 하여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을 살찌게 명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남쪽의 날을 이틀만 더 내리시어 무르익게 하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이제 집 없는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혼자인 사람은 또 그렇게 오래 홀로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책을 읽거나,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소요할 것입니다.
『형상 시집』
P.162 : 사랑의 노래
너의 영혼에 내 영혼이 닿지 않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영혼을 너를 넘어 다른 것에로 드높일 수 있을까? 아, 나는 그것을 어둠 속 어느 잃은 것 옆에, 너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어느 남모르는 조용한 자리에 숨겨 두고 싶다. 그래도 너와 나를 스치는 모든 것은 두 현에서 한소리를 불러내는 바이올린의 활처럼 우리를 하나이게 한다. 어떤 악기 위에 우리는 펴져 있는 몸일까? 어느 연주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일까? 아, 달콤한 노래여.
『신 시집』
P.444 : 제8 비가
모든 눈으로 생물들은 열린 세계를 보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눈만이 반대 방향을 보는 듯, 그들의 자유로운 출구를, 덫이 되어 둘러막고 있다. 출구 밖에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동물의 표정에서 읽을 뿐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우린 이미 아이의 등을 돌려놓고 형상의 세계를 뒤쪽으로 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얼굴에 깊이 깃들어 있는 열린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세계를.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들뿐이다. 자유로운 존재인 동물은 언제나 몰락을 뒤에 두고 앞에는 신을 보고 있다. 걸을 때에는 영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샘물이 흘러가듯이. 우리는 단 한 번도, 단 하루의 날도 꽃들이 끊임없이 피어 들어가는 그 순수 공간을 만나는 적이 없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세계이다, 결코 부정이 없는 어디도 아닌 곳, 공기처럼 숨쉬고, 무한정이라고 알기에 탐내지 않는 순수한 것, 감시받지 않는 것이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릴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거기 몰입했다가 누군가에게 흔들려 깨어난다. 혹은 죽을 때 그것이 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른 사람이 보는 건 이미 죽음이 아니라 먼 곳이기 때문이다 …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