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인맨]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관객들이 두 명의 배우 캐릭터 속에 숨겨진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는 관객 또는 청중의 몰입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물론 현대미술이나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우, 관객과의 거리 두기 또는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 몰입을 방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과의 소통이 결여된 작품은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제1요일, 24쪽)
창조인간 정명훈의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음악가로서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인간의 성공신화라는 결과물에만 집중하는 오류를 범하고는 한다. 하지만 창조인간의 성공에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좌절과 시행착오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극복과 초월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창조인간의 성공신화는 각종 미디어매체의 영웅만들기식 편집과정도 커다란 몫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관용과 기회상실이라는 반대급부를 시한폭탄처럼 내장하고 있다. (제1요일, 47쪽)
미국이라는 덩치 커다란 학생이 학급에서 짱이 되었는데 옆 반에 싸움실력이 비슷한 전학생이 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같은 학급에서 말을 안 듣는 녀석이 또 튀어나온다. 녀석의 이름은 베트남. 녀석은 옆 반에 있는 전학생이랑 친척 간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짱은 만만하게 보이는 녀석에게 선방을 날린다. 그게 바로 베트남전쟁이다. 녀석은 날마다 짱한테 몰매를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틴다. 가끔 짱이 낮잠을 잘 때마다 시비를 걸어 보기도 한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짱으로 군림했던 시기도 잠시, 미국은 학급 내에서의 체면과 위신마저도 조금씩 떨어진다. (제2요일, 59쪽)
한 시간만 대화해보면 바닥이 보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식상하다고 표현한다.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고수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변화란 시대의 흐름에 무인탑승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대에서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자본과 사회의 이면에 숨은 간계와 전략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내는 사람을 창조인간이라고 말한다. (제2요일, 65쪽)
이러한 한국적 구별문화, 즉 주거지, 직업, 학벌이라는 3대 질병은 창조인간의 삶을 구성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다. 인간의 삶이란 사회적으로 보이는 삶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라는 이분법에 따라 끊임없이 갈등을 무한 반복하는 틀을 이룬다. (제3요일, 85쪽)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포르노 배우라는 직업을 선호하는 사람 또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세와 마인드이다.
한국, 중국, 일본 중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가장 비뚤게 자리 잡은 한국사회에서 치치올리나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인물이 정치가로서 장수하는 창조사회가 도래하는 날은 언제쯤일까? (제3요일, 96쪽)
상상력의 원천을 언급할 때 나는 음악이 첫 번째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형태가 없다는 것. 공기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 다시 들을 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바로 음악이다. 따라서 늘 음악감상을 생활화하되 가능하면 다양한 장르를 즐기는 것이 창조인간의 기초체력에 큰 도움을 준다고 강조하고 싶다.
음악 다음으로 창의력을 전파해 주는 존재가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 그리고 미술이다. 물론 영화라는 장르도 존재하지만, 수동적인 입장에서 관람해야 하는 영화시스템은 인간에게 주도권을 주지 못한다. (제4요일, 151쪽)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이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인 양 몰입상태에 빠진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의 탈옥을 간절하게 염원하는 착시현상에 휩싸인다. (제5요일, 178쪽)
그렇다면 왜 관객들은 탈옥을 소재로 한 영화에 몰입하는 것일까? 정답은 모든 관객의 마음속에는 또 하나의 감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월급쟁이라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재단하려 드는 직장조직이 예이다. 프리랜서라면 자신이 원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구조가 그것이다. 사업하는 이들이라면 하루하루가 크고 단단한 제도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부분이다. (제5요일, 180쪽)
남들이 볼 때 폼나는 삶을 살아 보겠다고 도를 넘지는 말자. 계급이란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과 마주친 순간,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내공의 강도는 천차만별이다. 매일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반복하는 타입의 인간형보다는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창조인간이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완성할 수 있다. 창조인간의 완성은 토요일에 달려 있다. 토요일은 우리에게 생명수와 같은, 소중한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제6요일, 209쪽)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주도한 파시즘 시대의 대중문화는 이를 조작하여 대중을 선도 또는 이용하려는 프로파간다로 쓰였다. 전시 상황에서 대중의 조건 없는 충성심을 고무하게 하기 위한 선동기구로, 대량생산 시대에 종속된 노동자 계층을 세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지배계급과 구별되는 차별적 의미로서, 대중문화는 그 모습을 달리해 왔다. (제7요일, 240쪽)
그는 직장인만이 유일하게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세대에게 비판의 칼날을 내민다. 안정된 생활만을 위해서 아무런 고민의 과정 없이 직장에 취업하려는 이들을 마루야마 겐지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선택한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안정된 삶이란 곧 변화를 포기한 삶이자 사회에 자신의 일정 부분을 저당 잡힌 노예의 삶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제7요일, 245쪽)
그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지금 속해 있는 사회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달력에는 없는 ‘제9요일’이다. 창조인간의 요일은 이미 우리가 아는 요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미래의 시간이다. 지금까지 ‘제9요일’에 연착륙하기 위해 일주일간의 시간여행을 했다. (봉 박사의 잔소리, 268쪽)
학교, 군대, 직장(또는 사회)으로 이어지는 성장의 곡선 속에서 객관식, 주입식 교육제도로 기초체력을 다져 온 한국인들에게 뚱딴지같이 창조라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일단 어린이집은 제외하고,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 1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데올로기 전파의 전초기지인 학교라는 곳에서 ‘창조적 인간’의 필요성을 제대로 교육한 적이 있었던가? 당연히 없다.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양지를 바라보며 늘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순응형 인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이를 먹고, 꼰댓소리를 들어가면서 제2, 제3의 순응형 인간들을 양산한다. 이른바, 순응형 인간들이 응집해 있는 한국에서 이제야 창조형 인간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을 육성하기보다는 다수의 체제순응형 인간을 양산해 내는 곳이 학교이다. 아마도 학교라는 곳은 국민교육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튀는 학생은 망치로 시원하게 내리치고, 말 잘 듣는 범생이들에게는 매타작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선사했던 곳이니까. (에필로그,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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