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수준은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그 기대가 불안할수록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세대의 삶 역시 안정되지 못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좋은 일자리 아니 보통의 일자리라도 갖는 일이 매우 특별한 행운으로 여겨진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준비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성장과정’을 일정 기간 더 거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보다 빠른 기간 내에 좋은 일자리를 갖으려면 유아기부터 20년 가까이 높은 투자를 해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부모 세대는 미래소득을 상당 폭 포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이를 보상하거나 노후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자식의 안정된 미래에 필요한 교육지출을 엄두도 낼 수 없는 계층의 비중은 늘어만 난다.
그리하여, 어쩌면 우리는 우리사회에 반세기만에 극명한 계층구조가 다시 발생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경제가 앞으로 더 오랜 기간 동안 좋은 일자리를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사회 전 구성원의 생애가 ‘불안’으로 규정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매일 40명 정도가 자살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및 노인 자살률은 무엇을 경고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두렵다. 한국경제가 사회구성원의 안정된 삶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을 낯설어 하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일자리의 창출은 여전히 경제성장의 결과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불안’의 기운도 성장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보통의 5-60대 세대는 물질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청년시절을 ‘불안’이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로 보냈다. 억압적 사회에 살면서도 정치적 자유는 당연히 미래에 대한 기대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대의 상당수는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비롯한 것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지난 반세기의 고속성장으로 한국사회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의 의사결정에 가장 큰 고려사항이 되어 버렸다.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새로운 성장을 위하여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금의 경제정책에는 구조전환을 위한 장기적 비전이 결여되어 있다. 단기적 경기부양을 위한 물량투입에 의존하는 정책기조는 습관적이며 퇴행적이다. 보다 두려운 것은, 이러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이 잘 생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사회적 노력도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대안의 주체가 되어야 할 진보 진영도 ‘성장’에 대한 이념적 알레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통상적인 경기부양에 목을 메고 있으나 이는 결국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재의 경제구조를 고착화할 뿐이다. 한국사회 전체가 성장과 구조고도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한국경제는 지난 반세기간 압축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충분한 질적, 구조적 전환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고속 성장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부작용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여전한 대기업 중심의 성장이라는 경제정책 기조는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한국사회의 기득권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근 정부의 경제정책은 성장잠재력 제고, 부문간, 계층간 불균형 해소 등 우리 사회의 문제점 해결은 차치하고 오히려 회피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엄중한 현실적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자, 진보 진영은 ‘성장’을 위한 정책대안의 모색보다는 진보적 가치의 구현 그 자체에 더 큰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소득불균형 해소, 복지증대, 고용안정 등은 우리 사회가 매우 시급히 해결해야할 중대한 과제이며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진보 진영은 경제민주화 관련 의제의 선정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정책적 우위를 점하고 기여해 왔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진보진영의 노력과 현실적 성과는 응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구체적이고 위협적이다. 진보진영이 제시하는 다양한 경제민주화 과제가 이행된다면 이러한 불안감도 사라지게 될 것인가.
보수진영의 정책기조는 경제민주화를 도외시 하면서도 경제성장을 이룩해내지 못하고 있다. 보수진영이 천착하는 경쟁 위주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시장’을 파괴하는 수준에 이를 수도 있는 가공할 상황을 만들어 낸다. 경쟁은 시장을 강하게 만드는 수준에서만 유효하다. 만일 경쟁의 결과가 더 넓은 수준의 경쟁을 제한하는, 즉 시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파멸적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학업성적 위주의 경쟁만을 북돋우고, 일부 명문대학 입학의 프리미엄이 유래가 없이 큰 환경을 조성한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절대적 인구감소라는 한 공동체의 미래에 절망적이라고까지 해야 할 상황을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시장이 역동성을 상실하고 현재 기득권을 구조화할 경우, 시장은 결국 새로운 성장의 통로를 닫아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정책적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제안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이념적 진영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온 산업정책을 진보적 관점에서 다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산업정책은 정부실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후발개도국의 산업화에 필요조건으로 간주된다. 세계화와 함께 심화된 국가간 불균형은 이러한 인식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그리고 거버넌스의 발전은 정부실패의 위험을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과거, 산업정책은 시대별로 한국사회의 지향점을 성취하는데 주요 정책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산업정책을 고려하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겪고 있는 구조적 불균형, 고용창출력 약화, 독과점 구조, 내수 약화 등은 상당부분 과거의 산업정책의 부작용이다. 이러한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하여 새로운 산업정책을 활용하는 것은 한국경제에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 아니다. 한국의 사회경제적 문제점의 해결 방안과 진보적 가치가 일관성을 갖고 있고, 새로운 산업정책은 ‘진보적 성장’을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