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옥죄다 아스라이 스러진 불꽃. 헛헛하던 마음을 꽉 채워주던 온기가 사라지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허름한 옷 사이로 질척거리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검붉은 피를 닦아내며 숲길을 걸었다.
편안하고 깨끗한 공기가 넘실거리고, 푸른 초목이 밝게 웃던 나휘숲의 모습은 사라졌다. 태양빛이 내리쬐던 하늘은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했고, 발길 가득 잿빛의 먼지가 흩날렸다.
진한 어둠에 물들어 몸부림치는 꽃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꽃잎이 바짝 타버려 모래알처럼 부서지고 가느다란 줄기는 썩어 문드러졌다.
소중한 생명이 또 이렇게 가버리는구나. 눈가가 아프도록 따끔거리고 목구멍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그런다 한들 저들보다 아플까? 저들보다 힘들고 억울할까?
이곳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그게 아니라면 현재 나휘숲에 진실로 일어나는 끔찍한 현장일까?
차라리 그를 만나기 전,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던 꿈을 꾸는 것이 덜 괴롭겠다. 그와 마주하는 것이 힘들지언정 숲의 모든 생물이 어둠에 묶여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저들은 그토록 괴롭다고 날카로운 신음을 뱉어내건만, 내 신경과 감각은 느껴내질 못 하니 절망스러웠다. 차라리 그들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미안하고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랑! 정신 똑바로 차려. 손에 닿았다간 얼마 동안 팔을 움직이기 힘들어!]
[으, 알았어. 근데 자꾸 이 녀석들이 달라붙으려 한단 말이야.]
[투덜대지 마. 나휘숲은 지금 단명할 위기에 빠져 있어.]
익숙한 두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다급하고 앙칼진 향의 목소리와 꾀꼬리처럼 맑고 고운 랑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여기 가까이 있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숨을 뱉어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내달렸다.
‘다들 많이 힘들어요?’
강력한 어둠과 싸우고 있는 두 신은 매우 지쳐 보였다. 숨을 거세게 헐떡였고, 땀을 비 오듯 흘려냈다. 다 쓰러져 가는 숲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이 안쓰러웠다. 더는 죄스러워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도망친 나에게 그들이 힐난의 눈빛을 보내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모두를 배신하고 떠나버린 내가 나쁜 년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달음박질을 쳐야 했던 것이다. 그들이 나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뒤를 돌았다. 그리고 내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의 형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줄기를 타고 날아오른 선과 불을 뿜으며 전진하는 뮈가 보였다. 모두가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미로 같은 꿈속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이렇게 헤매다간 또다시 시름에 빠진 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왜 그들을 만나서, 그들과 인연을 맺어서 이렇게 아파하는 건지. 무사히 집에 돌아왔는데, 왜 또 이런 꿈을 꾸게 하는 건지. 정말로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내가 뭘 어찌하면 좋을 것인지.
그가 보였다. 곧바로 눈가가 시큰하고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를 보고 자동으로 두근대는 심장이 한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다시 왔어?]
흐려진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생기를 잃어버려 축 내려간 그의 어깨를 보았다. 실성한 것처럼 웃음 섞인 울음이 튀어나왔다.
‘아아, 단.’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푸른빛을 띠는 입술과 절망이 이는 눈동자가 가까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갈수록 이상하게 그는 더 멀어지고 흐려졌다.
그를 잡아내기 위해 힘을 주어 주먹 쥔 손에서 처음으로 따스함을 느꼈다. 그 온기를 좇아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멀어지는 그를 향해 소리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듯 정신이 몽롱했다. 거친 숨을 뱉어내며 이마 한가득 식은땀을 흘려냈다. 땀을 흘리고 남은 자리엔 서늘한 한기가 무섭도록 스며들었다.
얼굴에 수선스럽게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공허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두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던 나의 방. 익숙한 가구들과 손에 익은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더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꿈에 나타나는 숲은 저 멀리 의식 너머로 숨겨두어야 한다. 차마 지워버릴 수는 없으니,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 감추고 다시는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이 몸뚱이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어버렸다.
머릿속으론 잊어야 한다고 명령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희미해져 사라진 그가 걱정되어서, 잡고 싶어서, 다시 그를 보고 싶어서. 어두운 통로를 지나 다락방으로 향했다. 일기장을 본다면 눈을 감는 순간,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을까?
빠져나온 서랍 밑으로 손바닥을 대보았다. 바짝 바랜 일기장의 질감이 아닌 거칠거칠한 나무 느낌만이 났다.
분명 이곳에 두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울먹거리며 두 번째 서랍도 빼서 살피고, 먼지가 가득한 다락방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는 거야. 대체.”
꿈속에서 그도 내 곁에서 사라지고 현실에선 일기장도 없어졌다. 이게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고 무엇을 예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피멍이 든 가슴에서 그리움에 사무친 고통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닫혀버린 다락방의 창문 사이로 미약하게 들어온 달빛만이 슬피 우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