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떠는 수다가 ‘공감수다’가 될 수만 있다면
당장 눈을 감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자. 환하게 미소 짓는 활동적인 모습이 떠오를까? 아마도 대개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아픈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자식들 키우고 온갖 가사 노동에 치여 살며 어머니들의 입에선 늘 “허리가 아프다. 다리 아프다. 어깨 아프다. 머리 아프다” 같은 말들이 붙어 다녔다. 몸 아프단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는 골치라도 아팠고, 자식과 남편 걱정에 하물며 가슴이라도 아팠다. 그렇게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대체로 ‘아프다.’ 그렇다면 여자는 왜 아픈가? 실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에 더 민감할 수도 있고, 고통에 대한 표현이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여성의 문화적 전통 탓일 수도 있다. 이유야 많겠지만 어쨌든 여성과 고통은 매우 친밀한 관계임은 분명하다.
수렵채취사회와 원예사회 이후 주류의 인류에게 적용된 생존적응방식은 크게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로 나눌 수 있다. 이로부터 발생한 각각의 문화적 특징은 산업사회로 이전한 이후 오늘날 까지도 여전히 지역별·국가별 문화적 양상을 구분 짓는다. 우리가 포함되는 전형적인 농경문화의 전통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동체 내부에서의 인격적 평가 기준이 유목문화전통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농경문화전통에서는 인내와 성실과 근면과 끈기 같은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인격적 덕목이자 인간적 가치가 된다. 왜냐하면 농경사회에서는 ‘변함없음’이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작하는 땅에 2배의 노동력을 투입한다고 당장 그 이듬해에 2배의 작황을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웃과 똑같은 일정으로 성실하고 끈기 있게 농사를 지으면 삶의 안전이 보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면 나머지는 오로지 하늘의 뜻이다. 바로 이러한 삶의 패턴이기 때문에 성실과 같은 덕목이 중요한 것이다.
또 자신이건 타인이건 실패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농경문화전통의 특징 중에 하나다. 농경사회에서는 단 한 해의 농사가 실패하면 곧바로 생존에 문제가 생긴다. 늑대에게 양을 몇 마리 잡아먹혀도 당장의 생존에는 지장이 없는 유목과는 차원이 다른 실패인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성과 보편적 여성문화는 본질적으로 농경문화적이라는 점이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실체적 차원에서도 농사와 구체적 유사성을 가진다. 따라서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책임 지워지는 삶의 조건도 농부와 비슷한 것이다. 사회가 재단하는 개별적 차원의 인격 평가도 거의 동일하다. 다시 말해 농사를 짓는 일과 똑같이 여성의 육아와 가사에 있어서 ‘인내와 성실과 근면과 끈기’라는 인간적 덕목을 바탕으로 하여, ‘변함없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지상 목표가 된다. 이처럼 보편적 여성문화와 전통적 농경문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유사점에 많은데, 부단한 인내의 고통이 요구되는 사회적 상황에서 ‘공감’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한국 아줌마들의 수다를 조롱하는 농담도 많지만 사실 수다는 만국공통의 여성문화다. ‘수다’는 인간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는 단어들인 ‘소통’, ‘대화’, ‘대담’, ‘담화’. ‘담론’ 등과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존재한다. ‘수다’는 사전적으로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을 뜻하는 단어다. 이것은 영어도 마찬가지다. ‘talk’, ‘dialogue’, ‘conversation’, ‘discussion’, ‘communication’, ‘speak with’ 등과 별도로 prattle, chatter같은 단어가 따로 존재하는데, 이는 쓸데없음을 비웃거나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사람의 말을 의미가 아니라 소리로 인식할 때 활용하는 단어란 뜻이다. 그런데 여성들의 오랜 전유물이었던 이 수다가 현대 사회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극단적인 단절과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바로 이 ‘수다를 통한 공감’의 필요성이 자각되기 때문이다. 즉 적극적 공감의 수단으로서 수다가 적극 활용되는 셈인데, 가령 현대정신의학에서 시도하는 상담심리치료의 경우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수다’이며,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공감은 분명한 정신적·심리적 치유의 효과가 있음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심리학과 뇌 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얻은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에는 이미 사회적 연결에 필요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고 한다. 공감하는 능력은 거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심각한 ‘공감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어른들은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직장에서 상시적으로 폭력적 수준의 갈등에 시달린다. 또한 현대인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대형 참사를 목격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어지는 이상증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을 ‘공감피로’라고도 한다. 저명한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보편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의 경우는 스스로를 지키고 돌볼 수 있는 여력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여성 특유의 현명함이 발휘된다. 수다를 통한 공감행위를 적극적으로 시도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수다 대상은 무차별적이다. 같은 직장을 다니거나 학교 동창 같은 특별한 관계를 굳이 전제하지 않는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 같은 시간 미장원에 앉아 있다는 이유, 심지어 마트에서 장을 보며 같은 식재료를 구입한다는 이유…. 이유가 너무나 다양해서 실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회적 연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 바로 여성 특유의 수다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효용가치 충만한 여자들의 수다에 딱 한 가지만 조언해 주고 싶다. 바로 ‘공감’과 ‘동정’을 구분해 보자는 것이다. 『공감의 힘』 (데이비드 호우)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공감은 우리가 타인의 감정에 공명할 때 일어난다. 반대로 동정은 ‘상대의 감정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감정적 상태나 조건에 대해 보이는 감정적 반응으로서, 상대에 대한 슬픔의 감정이나 상대의 안녕을 염려하는 마음’을 말한다. 좀 더 명확한 차이를 말하면, 공감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고, 동정은 단지 상대에게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해 주는 것과 같다. 즉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동정이라면 공감은 상대로부터 유발되는 것이다.” 기왕 떠는 수다가 ‘공감수다’가 될 수만 있으면 된다.
최근 출간된 『내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야』(수 패턴 테올 著, 그여자가웃는다 刊)는 매우 영리한 대중심리학서이며 여성자기계발서다. 정신 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인 저자는 여성 특유의 수다를 ‘공감수다’로 업그레이드시킨 후 이것을 여성심리치료에 적극 적용한다. 일목요연하게 나눠진 구성과 부드러운 수다형의 문체, 그리고 간결하고 여성스러운 편집이 어우러져 독자들의 마음부터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심각한 말투로 독자를 윽박지르지 않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수다에 가까운 저자의 조언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비단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심리적 정황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여성들의 내적 상황을 보게 되고 곧 적극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결코 그 조언이 막연하지 않다. 매 챕터마다 세 가지의 실천과제들이 단 세 줄로 정리되어 있어 실용성도 높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아픈 마음과 공감하고 나면, 독자는 자신의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위안부터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위안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고, 용기는 내적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를 만들어 준다. 결국 사람의 모든 내적 문제의 해결은 의지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야』는 현대의 여성들에게 더없이 강한 자기치유의 의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책이라고 확신한다.
김성신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