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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랑 유치진
한국 연극의 아버지

동랑 유치진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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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공연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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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3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796쪽 | 175*245*40mm
ISBN13 9788959666911
ISBN10 895966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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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유민영
1937년 경기 용인 출생. 문학박사. 서울대 및 동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 연극학과를 수학하였다. 한양대 국문학과 및 연극학과 교수, 단국대 예술대학장, 방송위원회 위원, 예술의전당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및 석좌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예대 석좌교수 및 단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한국연극산고』, 『한국현대희곡사』, 『한국극장사』, 『한국연극의 미학』, 『전통극과 현대극』, 『개화기 연극 사회사』, 『한국연극의 위상』, 『한국근대연극사』, 『한국근대극장 변천사』, 『이해랑 평전』, 『20세기 후반의 연극문화』, 『격동사회의 문화비평』, 『한국연극운동사』, 『문화공간개혁과 예술발전』, 『한국인물연극사』(전 2권),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 『한국연극의 사적 성찰과 지향』, 『한국근대연극사 신론』(전 2권), 『인생과 연극의 흔적』 외 여러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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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랑은 태어날 때부터 척박한 상황 속에서 우주니 인생이니 하는 보다 본질적인 사유 속에서 예술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버거운 시대, 역사와 대결해야 하는 전사(戰士)와 같은 처지에서 연극운동을 해온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다. 가령 그가 당초 연극운동에 나서게 되는 배경만 보더라도 국권을 잃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계몽적 차원에서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가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나라가 있고 예술도 있는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는 매우 특이한 신념을 갖고 활동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시대상황에 기인한다고 볼 수가 있다.
--- p.18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 속에 처음으로 연극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런 문학적 형태에 대하여 비교적 부정적이어서 흥미롭다. 그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가운데 성격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고 번다해 보였던 연극장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연극에 별다른 흥미나 관심을 두지 않은 데는 그가 설명한 대로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데다가 비교적 보수적인 경상도라는 지역성과 유학(儒學)에 능했던 부친의 예능천시사상과도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이 점은 그가 일찍이 자전에서도 “방학이면 각종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소인극 등이 고향에서 열렸고, 나는 소인극과 아동극 관계에 열을 올렸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취미였지 이렇게 내 평생을 바칠 대상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당시는 유교적 인습의 잔재로 연극을 하려면 중대한 사회적 신분 변화를 각오해야 했다. 연극인은 천인(賤人) 계급인 재인(才人)이나 광대로 취급되었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온전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중학생시절까지만 해도 자신이 연극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고 했다.
--- p.71-72

그가 자신의 전반기 대표작으로 꼽는 [소]를 극연에서 무대에 올리려 해도 번번이 검열이 불통과된 데다가 학생예술좌원들이 도쿄에서 공연한 팸플릿까지 트집 잡아 고문을 당한 마당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 현상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동아전쟁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문화 탄압을 강화해감으로써 그 피해를 우리 예술인들이 극심하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글에서 “한 연극이 공개되는 이상 시대적 객관적 조건을 도외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 것처럼 다중을 상대로 하는 연극은 문학 작품과는 달리 2중 3중의 관문을 거쳐야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공연 자체가 불가능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서 그는 작가로서의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그 한계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길로서 취재원(取材源)을 현실로부터 역사 속으로 돌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 p.199-200

그에게 [춘향전]을 불온한 작품으로 모는 것 자체가 가소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단호했다. 얼마 전 요주의 인물로 찍혀온 연극 동지 김광섭(金珖燮)이 재직학교(중동고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명목으로 구금되어 있었는데, 죄목 중에 김광섭이 [춘향전](유치진 작)을 예로 들어 계급투쟁이론을 주입했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를 기소하려면 동랑이 그 작품을 그런 계열이라고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랑이 단호히 부정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는 칼 마르크스 이전인 조선의 숙종조에 나온 원작을 각색한 것이 자신의 희곡 [춘향전]인 만큼 그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그는 칼 마르크스가 살아 있었다면 개탄할 일이라고까지 했다. 그러자 경찰은 원작은 그렇지만 각색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계급성을 투영한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 p.246

김관수의 증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대추나무]가 일제가 강력하게 추구했던 국책극으로서는 미흡해서 당초에는 수상권에 들지 못했다가 일본인 심사위원의 강요로 수상케 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던 대로 동랑이 이 작품에서 분촌문제를 다룬 것이 사실이지만 작품 속에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데 그치고 만주 개척과 청춘남녀의 운명적 사랑에 비중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랑에게 상이 돌아간 것은 그가 연극인으로서는 포섭대상 제1호였기 때문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총독부가 동랑에게 계속해서 당근을 주어야 한다는 계산에 따라 연극상도 주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마치 일제가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춘원 이광수를 일찍부터 협박 회유하여 제국주의 선전용으로 이용했던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랑은 극단 현대극장을 이끌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일제에 아유(阿諛)하거나 굴종한 것은 아니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운명이라 체념하고 일제가 강요하는 것에 순응은 하면서도 자기의 진정한 속내를 소극적으로나마 표현하려고 발버둥친 인물이 바로 동랑이다.
--- p.308

동랑은 극장이 갖는 정치ㆍ사회ㆍ문화적 가치가 대단하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국가가 제대로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차제에 국립극장을 세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혀간다. 때마침 일부에서는 이미 군정청을 상대로 하여 국립극장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했다. 즉 동랑이 제외된 채 그의 연극 동지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서항석을 중심으로 하여 급속이 전개되었던 국립극장 설치운동은 추진 주최자 러치 장관의 급서(急逝)와 부민관 사용을 놓고 흥행업자 김동성(金東成)과의 갈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가 먼저 발의했든 간에 국립극장 설치운동은 일단 점화되었기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 바로 동랑이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동랑을 중심으로 한 설치운동은 힘을 얻었고, 정부 역시 그에 호응하여 공보처로부터 흥행 허가권을 인수한 문교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갔다.
--- p.375

그가 구미 각국을 돌아보면서 절절하게 생각했던 것과 관련해서는 “내가 무엇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대부분의 나라에 우리나라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면서 “심지어는 기자를 만나도 그런 야만국에 무슨 문화나 연극이 있느냐 하고 미리 깔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의 작품을 서너 개 번역해서 가져갔고, 뉴욕에서는 출판도 하게 되었으니 말발을 세워 인식을 고쳐주기는 했으나,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선전도 못 했고, 정리도 못 했으며, 우리가 야만국이 아니라는 것을 외국에 보이기 전에는 독립성도 없는 것임을 느꼈다.”고 하여 약소국가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덧붙여서 그는 “우리의 문화 정책이나 대외 정책을 하루속히 잘 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더욱 더욱 공부하여서 외국에서 야만국이라고 보지 않도록 인정을 받는 것만이 우리가 떳떳한 독립국가임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국과 우리 연극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야말로 그가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우리나라 사정과 연극 상황을 부지런히 소개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 p.482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드라마센터 건립 하나만 가지고도 연극사에 남을 일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드라마센터 구조에 누천 년 세계 극장의 역사를 압축시켜놓은 데다가 현대적인 영상예술의 기능까지 접목시킴으로써 한국 공연예술이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펼치고 나갈 기본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돈만 있다고 해서 아무나 세계 극장의 역사를 압축한 초현대적인 극장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계 연극사를 꿰뚫고, 또 무대 구조도 잘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구보다도 연극공부를 광범위하게 해둔 데 따른 그의 높은 안목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평소 극작만 한 것이 아니고 비평, 연출, 그리고 영화까지 연구했기 때문에 영상기법까지 도입할 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연전에 세계일주 연극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서책으로 공부한 것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보려고 그리스의 원형극장에서부터 현대적인 오픈 스테이지까지 일일이 분석하여 거기서 얻은 결론을 드라마센터에 극장 구조에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유소년시절에 고향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경했던 [오광대] 가면극의 열린 무대 공간도 세계 첨단적이면서도 토착화된 드라마센터를 탄생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p.572

그가 당시 우리 연극인들이 전혀 이해 못 하고 또 음악 무용극을 하기에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시절에 훈련이 안 된 배우들을 데리고 두 달 동안이나 연습하여 초기 형태의 뮤지컬을 만들어낸 것도 결국 한국의 미래 연극에 대한 하나의 작은 봉화(烽火)를 올리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서양 뮤지컬 방식으로 시도해본 [포기와 베스]를 보고 “연극은 역시 즐거워야 되고 그런 면에서 뮤지컬이야말로 한국 연극의 낙후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뮤지컬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다고 만날 딱딱한 언어극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든 뮤지컬 연기자를 따로 양성해서라도 뮤지컬이 우리 연극의 한 갈래로서 키워야겠다.”고 그 속내를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 p.587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아카데미를 열면서 생각한 것이 단순히 연극인 양성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당시 이미 대중오락으로 자리 잡은 영화계 인재는 물론이고 장차 각광받을 미디어라 할 TV 분야에서 활동할 인재(기술자, 탤런트 등)들의 양성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강좌도 대단히 다양하고 강사진도 당대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로 짜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가령 커리큘럼을 보면 교양 국어와 화술부터 시작하여 연극개론, 한국 연극사, 동서양 연극사, 동작, 분장, 무용, 무언극, 무대미술, 영화개론, 라디오ㆍTV개론, 실습 및 세미나, 영화감상, 그리고 연기의 개인지도 등과 같은 실기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특기할 만한 부분은 당시 아카데미에 깊숙이 간여했던 오사량의 회고대로 동랑이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민족극 수립을 위해 그 바탕이 될 우리 민속을 전수케 한 것인바 이는 비단 연극뿐만 아니라 교육의 주체성을 위해서도 매우 의의가 클 뿐 아니라 동랑 선생의 민족적 예술관의 소이이기도 하다”라고 한 점이다. 실제로 동랑은 교수 요원 확보문제와 시간 관계상 가면극이라든가 판소리, 그리고 남사당패 연구 등과 같은 전통연희에 관한 강좌는 정규 커리큘럼 외의 특별활동 시간으로 배정해서 학생들이 교육받도록 했다.
--- p.589

반년에 걸친 부녀간의 대화 단절은 결혼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애제자에서 서랑(壻郞)으로 바뀐 안민수는 예정대로 결혼 직후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인형 역시 집을 떠나 모친의 4촌 여동생 집에 임시 거처를 정해야 했다. 이때가 부녀로서는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 그러다가 그녀가 여름 들어서 안민수를 따라 하와이대학으로 떠나게 된다. 이때가 부녀간의 눈물의 화해 계기가 되었음을 인형의 다음과 같은 회고가 잘 보여준다. (…)
이때 인형에게 건네준 여비는 동랑이 동국대학에서 받은 정년퇴직금 전체였음을 미루어볼 때 그가 장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 p.720-721

게다가 그가 평소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계씨 청마 치환이 1967년 2월에 자신이 살고 있던 부산의 동네에서 버스사고로 불의의 불귀의 객이 된 것은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손아래 동생이기도 했지만 한국 시단의 혁혁한 대시인으로서 유씨 가문의 자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은 겹쳐온다는 속설대로 드라마센터가 어려울 때, 고향에서 잘 있다가 자신을 도와주려 상경했던 둘째 아우 치담(致?)마저 장남의 유고로 슬픔을 달래다가 타계함으로써 그의 슬픔을 더욱 배가시킨 것이다.
동랑이 치담이 타계했을 때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대성통곡까지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가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감으로 잘 있던 계씨를 드라마센터가 어려울 때 강제로 불러올리다시피 하여 고생시킨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한다면, 다른 한 가지는 계씨가 가장 아끼던 생질(大馨)이 군복무 중 자살한 데 충격을 받고 자결한 것이 그를 더욱 애통케도 했다. 그 후 그는 고향 생각을 많이 했고 시간 날 때마다 고향 앞바다를 그리워하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 p.743

그의 병상을 끝까지 지켰던 장녀 인형과 서랑 안민수의 증언에 따르면 동랑이 이따금 눈을 뜨고서는 “인형아, [포기와 베스]를 뮤지컬로 만들어봐라”, “민수야, 네가 전번에 연출했던 [리어 왕]을 음악극으로 다시 한 번 만들어봐라” 했고, 한참 후에는 “얘들아, 드라마센터를 자꾸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재밌는 연극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다음 날에도 의식이 조금 돌아온 상태에서 “얘들아, 우리 학교에 학생들이 얼마나 지원했냐? 입학시험에서는 반드시 실기만 보도록 해라.”고 당부한 얼마 뒤 동랑은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고 1974년 2월 10일 오전 8시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겨울날 아침 그에게 영세를 주었던 세종로성당 박귀훈 신부의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 69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 p.759,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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