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호는 금동琴童, 춘사春士.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배따라기][감자][광염 소나타][발가락이 닮았다][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조선일보에 학예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1935년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 친일소설 [성암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과 단편 [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현진건
호는 빙허憑虛. 1900년 9월 9일 경북 대구에서 현경운의 4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개벽開闢》에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빈처?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홍사용·이상화·나도향·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당시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일장기를 삭제하고 보도한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최서해
함경북도 성진 출생. 본명은 학송(鶴松).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밝았다. 1918년 모친과 함께 간도로 이주하여 소작인 생활을 하다가 야반도주하고 음식점 머슴, 부두 노동자 등을 하며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1923년 귀국한 후에 조선문단사에서 일을 하다가 1925년 「조선문단」 3월호에 「탈출기」가 실리면서 문명을 얻기 시작했다. 간도에서 직접 체험한 하층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체험 작가’라는 별명을 얻지만, 그런 경향의 작품 외에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작품도 썼다.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로 일하며 창작 활동에 매진하다가 1931년 유문협착증 수술 도중 사망하였다.
한설야
본명은 한병도이며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1925년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대표작으로 『황혼』, 『과도기』가 있습니다. 해방 뒤 조선문학예술총동맹과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을 지내며 북한 문학 발전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을 맡았을 때에는 어린이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접 아동문학분과 활동을 지도했고, 어린문학의 창작 방향을 제시하며 『아동 혁명단』, 『만경대』, 『금강선녀』 등을 창작했습니다.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성장한다. 강경애의 술회에 의하면, 그녀는 이 시절에 집안에 있던 ≪춘향전≫ 등과 같은 고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1921년에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923년 10월 엄격한 종교 생활에 항의해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하자 동경 유학생이던 무애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다. 강경애는 1924년 5월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책 한 권>이라는 시를 가명으로 발표하고, 1925년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1931년에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장연 군청에 고원으로 부임한 장하일과 결혼하지만 장하일의 조혼한 아내로 인해 인천과 간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생활한다. 이후 <그 여자>(1932), <부자>(1933), <소곰>(1934)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장연과 만주 간도 등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1934년 그녀는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연재한다. 이 작품은 황해도 용연과 인천을 배경으로 하여 농민들의 힘겨운 삶과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 문제작이다. 1936년 강경애는 용정에서 안수길·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 동인을 결성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해에 <지하촌>과 같은 사실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조선판에 <장산곶>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했으나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2월에 사영해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26일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