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백릉(白菱),채옹(采翁).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채규섭(蔡奎燮)의 6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稱田大學)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1923년 중퇴했다. 그 뒤 《조선일보》,《동아일보》,《개벽》 등의 기자로 전전했다. 1936년 이후에는 직장을 가지지 않고 창작생활만을 했으며 1945년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해 이리로 옮겨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1920년 은선흥(殷善興)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그 뒤 김씨영(金氏榮)과 동거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단편소설과 희곡,평론,수필을 썼다. 특히,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장편으로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탁류(濁流)],[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금金의 정열],[여인전기]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레디메이드 인생],[치숙(痴叔)],[패배자의 무덤],[맹순사],[미스터 방(方)] 등을 들 수 있다. 희곡으로는 [제향날],[당랑(螳螂)의 전설] 등이 대표적이다.
염상섭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7년 교토 부립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慶應)대학 문학부 예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오사카 텐노지(天王寺) 공원에서 재일동포들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가 검거, 투옥됨으로써 학업을 중단하였다. 1921년 처녀작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잡지 《개벽》에 발표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으로 [두 파산]『삼대』 『무화과』 『만세전』 『취우』 등이 있다. 1963년 사망했다.
이효석
아호는 가산可山, 필명으로 아세아亞細亞,효석曉哲 등을 쓰기도 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의 교사인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홍경 사이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이효석은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1928년 경성제대 재학 중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이효석은 경향파의 동반작가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단편 〈깨뜨려진 홍등〉〈마작 철학〉 등을 썼다. 1932년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취직해 생활이 안정되면서 초기의 경향문학에서 탈피하고 순수문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1933년 순수문학을 지향한 구인회의 창립회원이 되어 〈돈〉〈수탉〉 등 향토적 소설을 발표한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다음 〈계절〉〈성화〉〈메밀꽃 필 무렵〉〈들〉〈산〉〈인간산문〉〈분녀〉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1940년 상처喪妻하고 아이까지 잃으면서 극심한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때 건강을 해친 이효석은 1942년 뇌막염으로 사망하게 된다. 1982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이효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02년 이효석문학관이 강원도 평창군에 세워져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김남천
소설가,평론가,수필가로서, 남과 북에서 많은 글을 남긴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이다. 김남천은 카프의 조직원으로서,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본 변혁을 이루고자 했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의 근저에 놓인 것이 혁명적 정치성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김남천은, 혁명적 정치성의 이념에 몸을 싣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향해 내달았던 많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으로 묶여 있다가 1988년의 해금 조치에 따라 서점에서, 학교의 문학 교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문인이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어기찬 열정에 이끌려 펼쳐졌다. 역사의 거친 물결 한복판에 들어 크게 흔들렸지만 김남천은 쓰러지지 않고 고투하여 큰 문학을 일구었다. 90여 편의 평론, 40여 편의 소설, 두 편의 희곡, 한 권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필 등이 구축하는 높은 봉우리가 염상섭, 채만식, 이기영, 임화 등 다른 우뚝한 봉우리들과 나란히 20세기 초중반기 문학사의 산줄기에 솟아 있다. 연구자들의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김남천의 최후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상징적이다. 휴전선을 넘어 전해진 ‘소문’에 근거한 몇 가지 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대 한국 사회의 주변부였던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나 한국 사회의 전면 해체와 재구성을 꿈꾸었으나 실패하여 캄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 한 진보적 정신의 삶과 문학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남천은 생전에 장편소설 ≪대하≫(1939)와 ≪사랑의 수족관≫(1940), 창작집 ≪소년행≫(1939)과 ≪삼일운동≫(1947) 그리고 ≪맥≫(1947) 등,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생산량에 비해 터무니없다 할 정도로 적은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완성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김남천 연보 속에는 ≪낭비≫, ≪1945년 8,15≫, ≪시월≫ 등 미완의 장편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것들을 포함하여 책에 묶이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 정리하는 것은 후인들의 책무일 터이다.
전광용
191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945년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해방 후 경성경제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문학에 뜻을 두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다. 동인문학상(1962), 대한민국문학상, 사상계 논문상(1956)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꺼삐딴 리』 『흑산도』 『동혈인간』 『목단강행열차』 『태백산맥』 등이 있다. 1988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