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AMP)을 수료했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영업현장과 마케팅 업무 등을 두루 담당하며 1992년까지 근무했다. 입사 초기 삼성전자는 가전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치열한 영업 마케팅 전쟁을 치렀다. 사실상 그 당시 함께 일했던 그와 그의 선후배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삼성전자의 DNA를 만들어낸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면서 “아무리 장사를 잘하더라도 마케팅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1992년 (주)아코상사를 설립해 미국 씨피에프사 필름의 한국 에이전트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코상사는 ‘한국의 예술이 되자’는 의미로 아트코리아의 약자이다. 그 당시는 자동차에 필름을 바른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썬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기다. 그 역시 필름의 ‘필’자도 모른 채 덜컥 뛰어들어 4년 만에 업계 1위를 했다.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 때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지옥을 겪으면서도 “필름이라고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가 되지 말란 법이 있나?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을 대표한다면 우리가 썬팅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가 돼보자.”라는 포부를 품고 썬팅전문점 유치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썬팅전문점은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480개가 운영 중이다. 또한 업계 최초 보증제도, 업계 최초 전면썬팅, 업계 최초 썬팅경연대회 개최 등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말해 맨주먹 자수성가 그 자체이다. 그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악’과 ‘깡’으로 맞서 싸우며 개척해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열다섯 살부터 학교를 때려치우고 서소문 법원 앞에서 구두닦이로 일했다. 낮에는 죽어라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해 대학까지 갔다. 대학에 가서도 구두닦이, 채소 장사, 수박 장사, 아파트 수위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잔디 까는 일을 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못 쓰게 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줄 하나에 의지하며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처한 열악한 환경에 지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고 개척하면서 지금의 성공을 이루어냈다. 또한 2002년 경상북도 문경시에 사회복지법인 ‘미오림복지재단’을 설립해 지적장애인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돕고 있다. 2007년 전경련 국제경영원 최우수 경영인상과 2008년 국제로터리 폴 해리스 봉사상을 받았다. 또한 2010년 신지식인상을 받았고 2012년과 2015년에는 우수납세자로 선정되어 각각 기획재정부 장관상과 부총리상을 받았다. 현재 루마코리아 대표이자 전경련 최고경영자과정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자신감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전쟁터에 비유한다. 그런데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서 자신감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갑옷과도 같다. 갑옷이 없는 사람은 결국 회사생활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삼성전자에서 19년 동안 근무하면서 영업관리, 채권관리 등 다양한 업무를 모두 해왔다. 나처럼 다양한 부서를 모두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가전제품은 기본이고 자판기, 시계, 금전등록기, 카메라, 방송용 장비 등 거의 모든 제품을 다 팔았다. 그래서 많은 분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묻는다. 그건 바로 자신감이라는 갑옷을 항상 걸쳤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마다 내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난 할 수 있다. 아이 캔 두I can do. ’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항상 현실로 이어졌다. 또 필름 사업을 시작할 때도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IMF 외환위기 때 나를 지탱시켰던 무기 역시 자신감이었다. -47쪽
? 하지만 상대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몰입을 하면 답을 찾는다고. 어느 날 ‘1원’에 입찰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간혹 1원 입찰 사례가 있지만, 그때는 1원 입찰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에 1원을 적어낸다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선례가 없다고 해서 주저하기보다는 뭐든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 내가 사고를 한번 쳐보자. 이번 입찰은 사고를 치지 않으면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겁도 없이 상사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입찰장에 들어가서 1원을 적어냈다. 그러자 담당자가 깜짝 놀라서 나를 불러세웠다. “이거 잘못 쓴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맞게 적었습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우리 회사가 입찰에 성공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회사에 들어왔는데 1원 입찰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발칵 뒤집힌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사가 결재판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 미친 거 아냐? 어떻게 1원을 적을 수 있어? 너 회사 팔아먹을래?” -54쪽
? 그러다 그 말이 결국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삼성전자에서 19년 동안 일하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아무리 장사를 잘하더라도 마케팅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내가 업계 1등으로 올라서겠다.’ 필름 사업을 하는 동안 그 목표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나에게 ‘1’이란 엄청난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매직넘버였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쏟아부었다. 1등이라는 목표는 늘 나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결국 4년 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1등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목표 달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60쪽
?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생각해낸 가격이 바로 ‘149,900’원이었다. 지금이야 홈쇼핑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가격을 책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필름업계에서는 9,900원으로 가격을 정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1만 원, 5만 원…… 이렇게 딱 떨어지게 하는 게 보통이었다. 9,900원 식으로 가격을 생각해낸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격을 책정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확실히 남을 수 있고 또 동시에 싸다는 느낌이 들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카피를 멋지게 하나 만들어서 잡지에 광고를 냈다. “스모그 필름 149,900원에 엄청나게 싸게 팝니다.” 광고가 나간 후 사무실 전화통에 불이 났다. 필름가격이 공개되자 총판들은 물론이고 거래처들도 모두 놀라는 것이다. -79쪽
? ‘취업해서 돈을 벌면 나도 남들처럼 여자랑 데이트하자.’ 이화여대 근처에 하숙집을 정했다. 서울 그 넓은 지역에서 하필이면 이화여대 근처에 갔을까? 아무래도 여대 앞이니 예쁜 여자를 만날 확률이 높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하숙집을 정했다. 그리고 어떤 여성을 만나면 좋을지 계속 상상했다. ‘내가 인상이 좀 나쁘니 여자친구는 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눈이 크고 피부가 하야면 순해 보이니 나랑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아내가 된 약대생을 만나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자는 게 목표였는데 뜻한 바를 이룬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능력 있는 아내를 만난 것도 내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132쪽
? 그럼 상대의 마음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뮤지컬이나 연극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 꼭 하는 게 있다. 바로 리허설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미흡한 부분이나 보오나할 부분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리허설이 있기에 실전에서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상대를 만날 때도 이런 리허설이 필요하다. 리허설을 해보고 나가면 상대의 마음을 열 가능성이 훨씬 높다. “책상 위에서 연습하고 나가세요.” 내가 삼성전자 시절부터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한 말이다. 이제 무슨 의미일까? 즉 상대를 만나기 전에 마음을 열 방법을 고민해보라는 것이다. 한 번은 부산에서 대리점 소장을 할 때였다. 당시 회사 차원에서 전국에 있는 출장소들을 불러서 대리점 개설 경쟁을 시켰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내가 전국에서 1등을 한 것이다. 다른 소장들은 네다섯 번 찾아가서 이야기해도 설득이 안 됐다. 그런데 내가 가면 한 번에 ‘오케이’ 하는 것이다. 덕분에 포상금으로 5,000만 원을 받기도 했다. 그 비결이 뭐였을까? 말발이 화려해서? 아니다. 비결은 바로 책상 위에서 미리 연습하고 나가는 것이다. -158~159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행간 곳곳에서 김우화 회장의 인품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더 재미난 것은 좌충우돌하며 전개되는 사업 이야기였다. 그 속에는 기존의 경영학 이론과는 배치되는 이야기도 많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왜 학자들이 벤처기업을 하면 망하는지, 왜 경영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사업하면 실패하는지를 뼈저리게 통감하였다. 사업의 현실은 이론과 다르다. 김우화 회장의 생생한 증언 속에서 살아 있는 사업 성공의 방정식을 찾아보길 바란다.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나는 이 책을 통해 현실 직시와 정면 돌파를 배웠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외면한다.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다. 정면돌파 대신 방구석에 틀어박힌다. 그리고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대신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주길 바란다. 그는 다르다. 그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때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는 크게 성공했다가 또 크게 망했다가 다시 기사회생해 오늘날의 성공을 이루었다. 우리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오늘날 세계 속의 신화를 이룩한 삼성전자. 그 창사 초기에 후발 가전업체인 삼성전자의 영업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김 과장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는 늘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곤 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당시 영업 현장을 같이 했던 김우화 회장과의 추억들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루마의 성공은 그의 창조, 융합적인 생각, 순발력, 튀는 사고, 유능한 인적 네트워크가 이루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남을 배려하는 데도 남달랐다. 그러한 마음이 지금의 미오림복지재단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창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실전 마케팅 전략서’로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최충경, 경영학 박사/ 경남스틸 CEO/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예술가들은 장인이 되기 위해 영혼까지 바치려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김우화 회장은 예술가가 아닌 기업가이면서 장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사명을 ‘한국의 예술이 되자’는 포부로 아트코리아의 약자인 아코상사라고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김우화 회장의 비즈니스 인생의 그 모든 과정들을 옆에서 직접 보면서 항상 배울 점들을 발견하곤 했다. 이 세상에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극복하지 못할 운명도 없다. 내가 이 책에서 배운 것들이다. -이루마, 피아니스트
김우화 회장은 일단 저지르고 그다음에 생각한다. 그렇게 번개처럼 빠르게 결단하고 일을 저질렀으면서도 마치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것처럼 고품질을 유지하고 고도의 마케팅까지 구사해 깜짝 놀라게 한다. 그는 한마디로 돈키호테 같다. 필름의 ‘필’자로 모른 채 필름업계에 뛰어들어 4년 만에 당당히 업계 1위로 우뚝 섰으니 말이다. 그가 한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혹은 누군가를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며 찾아낸 해답들이다. 이 책 안에 그 모든 노하우가 다 담겨 있다. 지금도 그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늙지 않을 것이다. -이영석, 총각네 야채가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