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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제국의 탄생

이슬람제국의 탄생

: 하나의 신과 하나의 제국을 향한 투쟁의 역사

리뷰 총점9.0 리뷰 6건 | 판매지수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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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4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656쪽 | 978g | 148*217*35mm
ISBN13 9791186293171
ISBN10 118629317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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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세비우스 시대로부터 500년이 흐른 9세기 초에도 경건함과 세속적 힘 사이를 오락가락한 학자들이 용의주도하게 고안해낸 해법은 여전히 눈부신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독교도들은 그 관점에 다소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지만,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거둔 그 모든 놀라운 승리가 신의 가호 덕이라 믿었고, 그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세기 전 하느님이 그들 조상에게 초자연적 계시들을 줄줄이 내려주셨다고 믿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도에게 내린 계시를 능가했을 뿐 아니라, 계시에 복종하자 세계 제국으로 가는 길까지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800년 뒤에는 대다수 아랍인들이 스스로를 ‘신에게 복종한 사람들’을 뜻하는 무슬림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대서양 연안에서 중국의 주변부까지 뻗어나간, 그들 조상의 검이 쟁취한 거대한 땅 덩어리가 신이 요구한 아랍인 복종의 궁극적 금자탑 역할을 했고, 그 결과 9세기 초에는 복종을 뜻하는 말인 ‘이슬람’이 하나의 온전한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31쪽)

아랍인들이 지난 시대를 연구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 것도 그렇게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느닷없이 대운이 뻗치게 된 이유, 그것의 진행 과정, 그리고 그것으로 드러난 신의 특성을 밝히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500년 전 에우세비우스가 그와 유사한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아 로마 황제의 전기를 썼듯이, 이라크 출신으로 9세기 초 이집트에 정착해 살았던 학자 이븐 히샴도 그래서 신의 목적을 헤아리기 위해 예언자의 전기를 썼다. 그는 그것을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뜻하는 ‘시라Sira’로 이름 붙였다. 전기의 주체가 한 일보다는 그가 행한 방식이 주된 관심사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무슬림들에 따르면 전기의 영웅을 본보기 중의 본보기, 다시 말해 궁극의 본보기로 제시하기 위해서였다.(32쪽)

무함마드는 또 ‘예언자들의 봉인’이기는 했지만, 세속적 국가의 기초를 세우는 것도 무가치하게 보지 않았다. 하느님도 말씀을 계속 내리셨고, 무함마드의 자기 확신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쓸어버리거나 짓밟아버렸다. 극도로 혐오하는 빈부 격차가 줄어들지 않자 고리대금업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공평한 납세 제도를 수립한 것이나, 고향 도시가 ‘예언자의 도시’로 변하는 것에 좌절하여 그에 적대하는 책략을 쓴 야스리브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학살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40쪽)

이슬람의 도래가 세계 역사상 최고의 혁명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800년 이전에 작성된 기록 증거물이 쥐꼬리만 한 조각이나 혹은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한 정보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치명적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적 속에서 발흥하는 제국은 없다. 그런데 칼리프 왕조의 수립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최소한의 음향과 분노, 그 수 세기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 따라서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뿐인 것이다. 고대 제국인 페르시아와 로마를 와해시킨 아랍 전사들, 그 아들과 손자들은 이렇듯 철저히, 그리고 영원히 침묵당했다. 행여 작성되었을지 모를 서한이나 담화, 일지 중 어느 것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그러다 보니 칼리프조의 수립을 지켜본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믿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이는 서구의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두 번의 세계대전을 지켜본 사람의 기록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이름난 역사가가 9~10세기가 되어서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과거사를 정립하고 글로벌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내력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슬람 역사를 개관하면서, “이슬람 전통의 초기 층들이 부재한 것”을 애석해한 것도 그렇게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이슬람이 역사의 충만한 빛 속에서 탄생하기는 고사하고 꿰뚫어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어둠의 장막 속에서 탄생했다고 믿는 학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64쪽)

일반적 역사나 일대기를 쓰고자 하는 야망이, 무함마드 삶의 본보기에서 전능자의 소망이나 목적을 밝히는 무한대로 절박한 의무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 이븐 히샴을 뒤로한 채 불확실성과 억측이 난무하는 초기 이슬람 역사의 요동치는 바다로 과감하게 몸을 던진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신빙성 있는 자료를 찾는 데 그토록 애를 먹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스레한 망망대해에서 육지를 발견할 개연성은 애당초 없었다. 물론 꾸란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 그것을 덮어씌운 그 모든 외장, 9세기부터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을 감쌌던 주석의 얼개를 벗겨내면, 어두운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항해자의 상실감만 더해줄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학자의 말을 빌리면, “어떻게, 그리고 왜 그 물의 사막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줄 특징 하나 없이 황량한 바다에서 불쑥 튀어 나온 거대한 바위처럼 홀로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언제 출현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치명적이었다.(66쪽)

학문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공백을 혐오한다. 지난 40여 년간 다수의 역사가들이 이슬람의 기원을 감싸도는 듯한 으스스한 침묵에 때로는 혼란스럽고 과격하게 이슬람의 기원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맞서온 것도 그래서였다. 꾸란의 기원이 아라비아가 아닌 이라크에 있고, 꾸란의 집필에 사용된 언어도 처음에는 아랍어가 아닌, 당시 근동의 공통어였던 시리아어였으며, ‘무함마드’도 본래 예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60 세계적인 주요 종교의 기원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고쳐 썼으니, 책 표지도 성전 기사단이나 성배의 그림 정도는 되어야 어울렸을 법하다. 그러나 획기적인 주장을 했다고 해서 내용까지 획기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기원에 대한 글을 쓴 학자들 대부분이 댄 브라운을 모방하기보다는, 지극히 모호한 언어와 그보다 더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여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내용으로 만들어버린 탓이다. 따라서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도 미미하여 지난 10여 년간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관심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것에 비해서는, 이슬람의 기원과 관련한 학문적 연구를 휘감아 돈 위기감은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 어스름한 바다 괴물처럼 수면 위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심해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67쪽)

다행인 것은 그 모든 혼란과 모호함의 와중에도 하나의 사실, 이슬람이 완전한 무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경쟁하는 초강대국들 및 강력한 일신교들(기독교와 유대교)이 버티고 있는 세계에서 탄생한 것은 확실하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칼리프국에서 발전해나간 이슬람 제국을 보편적 국가를 자임한 페르시아, 로마와 비교하거나 혹은 꾸란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기록의 흔적을 찾다 보면, 또한 여러모로 볼 때 이슬람이 과거사의 종결이 아닌 과거사의 절정이었음도 알게 된다. 이슬람 교리가 고대 근동의 심토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은, 예언자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준 매개자가 인간이 아닌 천사였다고 믿는 무슬림들의 오랜 확신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함마드가 동굴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처음 가브리엘과 조우한 전통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꾸란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꾸란에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고 빠져들었다는 최초의 번민에 대한 말도 없고, 심지어 초자연적 목소리를 들은 것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아랍인들에 의해 정복된 지역들에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특별히 미치는 곳에 천사들이 나타났고 그 경험은 때로 고통스러웠다는 점이 오래도록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 그럴 개연성은 희박하다. 그보다는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와 로마가 다져놓은 토대 위에 그들 고유의 것으로 구축한 세계―유일신의 목적을 헤아리려는 열망이 널리 퍼져나간 끝에 가브리엘이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된―에 조성된 독특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옳다.(72쪽)

그것들을 검토하면, 초기 아랍 정복자들이 활동한 곳과 한때 로마제국에 속했던 여타 지역(서쪽)과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알게 된다. 초강대국의 붕괴로 극심한 충격을 받고, 속주민들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고투하며, 생소한 언어를 말하고 야릇한 신앙을 믿는 외국 침략자들의 약탈에 시달린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등의 옛 로마 속주에 대한 아랍 정복이 말해주는 것은 로마제국의 서쪽 절반을 사라지게 한 상승 기류가 이제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78쪽)

7세기의 사료는 전무할 정도로 빈약하지만 그 200년 전의 사료는 스스로를 위대한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마지막 후예로 여긴 사람들이 쓴 저작물, 서한, 법률 요람, 연설 모음집, 상인이 작성한 지명사전, 야만족이 쓴 인류학적 기록물, 교회 역사서에서 힘겹게 고행을 한 성자들의 전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기독교 관련 서적 등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실제로 고대사의 다른 시대 기준으로 보면 그 시대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처럼, 고대 역사가들이 탐욕스럽게 확보한, 거의 기적에 가까운 분량의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지난 몇십 년간의 고대 후기 연구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이전에는 힘이 고갈되고 단조롭고 쇠퇴한 문명으로 결론지어졌던 것도 광범위하게 복원되어, 학자들도 이제는 그 문명의 노쇠함보다는 그 안에 담긴 에너지, 충만함, 창의력을 강조하게 되었다.(82쪽)

황제의 궁전에서 숭배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이제는 유일신을 믿는 유일한 선민이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지배 영역보다 한층 부유하고 위협적인 영역을 지배하는 로마 지배자들도 근래에 예수야말로 하늘의 지배자라는 믿음을 제국의 고동치는 심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지만 그 믿음의 기원은, 기록된 탈무드뿐 아니라 심지어 예수보다도 역사가 길 만큼 오래되었다. 달리 표현하면 로마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맞지만, 세계 여타 지역으로 퍼져나간 기독교에도 로마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의 제국에 하나의 신. 제국의 1000년 역사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도 없었다.(161쪽)

제국의 경계 너머에 사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조언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들도 낙관할 이유가 충분했다. 라틴어이고 역대 황제들의 감시 아래 무서울 정도로 엄정하게 다듬어진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렐리기오가 로마인들에게만 해당한다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권리는 가장 야심 찬 황제의 권리마저도 넘보지 못하는 전 세계적 권리라는 것이 기독교도들이 내린 정의였다. 로마 군단의 힘을 꿋꿋이 견뎌낸 야만족들도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세상의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일이 끝나면 하늘의 돔이 저 지구를, 거대하고 보편적인 하나의 신성한 지혜(하기아 소피아)로 덮게 될 것이었다.(251쪽)

이슬람의 기원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역사가들이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은, 꾸란과 그것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초자연적 아우라다. 메카에서 일신교가 출현한 것만 해도 예언자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곳은 애당초 유대인과 기독교도의 흔적조차 없이 거대하고 텅 빈 사막의 한가운데 위치한 이교도 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의 관련성까지 갖춘 완벽한 형태의 일신교가 출현했으니, 역사가들로서는 기적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슬람의 기원을 찾기 위한 지금까지의 세속적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언자가 표절자로 보일 수 있는 낌새만 나타나면 무슬림들은 과민 반응을 보이며, 그런 연구에 부득불 수반되게 마련인 언외의 의미에 분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신이 정보 제공자로 가치가 하락하면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이 꾸란에도 등장하게 된 경위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 또한 전적으로 타당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387쪽)

하지만 그것은 많은 의문을 낳게 할 뿐이다. 그렇게 경외하는 책을 그렇게 수많은 이슬람 법학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한 것만 해도 그렇다. 8세기 초 문자로 처음 기록되기 전의 꾸란의 역사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말이다. 꾸란을 필사한 사람들 모두 비할 바 없이 거룩한 말을 옮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한 것 같다고 해서, 역사가인 우리들까지도 무슬림 전통이 꾸란의 출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어쩌면 그래야 할지도. 하지만 절대 가시지 않는 두통과도 같이 예의 그 익숙한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드는 것이 문제다. 예언자의 최초 전기가 그의 사후 몇백 년이 지난 뒤에 집필되었다는 것과 거기에 적힌 꾸란의 기원과 관련된 설명 또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은, 단순한 문제를 넘어 골치가 지끈거리는 문제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꾸란이 작성되었다고 알려진 시기와 최초의 꾸란 주석서가 나온 시기 사이에는 대체 어느 정도의 간극이 있는 것일까?(392쪽)

기실 마니교 교리에 가장 무자비하게 대응한 것은 군주가 아닌, 기독교 주교, 조로아스터교 사제, 유대교 랍비 같은 경쟁적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 볼 때 어쭙잖은 예언자의 주장은 곱절로 터무니없었다. 자신들의 성서를 쓸모없는 계시로 치부한 것만으로도 모욕이 되기에 충분했는데, 그보다 더 역겹게도 짝짓기와 이종교배를 일삼는 경쟁적 종교들의 포주 노릇을 하며, 그 모든 난혼으로부터 사악한 그의 교리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는 잡종까지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로마와 페르시아 모두 이런 관점으로 경직성을 더해가며 기본 가설을 더욱 굳혀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너무도 흔한 현상이던 신앙들의 경계 흐리기와 합체를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악취 풍기는 죄악으로 간주하고, 다양한 신앙들 사이에 펼쳐진 공백지 또한 여하한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곳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554년에 열린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의 종교회의에서 표현된 말을 빌리면, 신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보호자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채, 높은 방벽”을 쌓는 일뿐이었다. 세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로 갈라졌을망정 한 가지 점, 제2의 마니가 탄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전적으로 일치했다.(411쪽)

실제로 로마와 페르시아의 대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아라비아에서 숭배의 돌연변이 현상이 일어나서 그 악몽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잡종 이교들이 생겨나자 종교 시장 자유화로 초래될 수 있는 우려스러운 징후도 함께 나타났다. 유일신이 세계의 창조자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전능함도 거리낌 없이 고백하며, 모세와 예수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게 갖춘 공동체가 알우자도 숭배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랍비와 수도사는 무엇을 했느냐고 혹평가도 맹비난을 퍼부었듯이, 그것이야말로 가장 추악하고 타락한 형태의 시르크였다. 하지만 정작 그 비난에 대한 총대를 메고 나선 사람은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도도 아닌 아랍인 무함마드였다. 그는 무슈리쿤을 단순히 이해 불가능한 동맹이 아닌, 그보다도 한층 혼란스러운 존재로 보았다. (……) 그렇다면 무슈리쿤은 알우자를 여신으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여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믿었다는 것일까? 그 답은 예언자가 알우자를 이름으로 언급하기 무섭게 이내 “내세를 믿지 아니한 자들은 천사들을 여성이라 부르니”라고 말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예언자는 알우자를 여신이 아닌, 하느님의 딸로 지위를 강등시킨 것이었다.(415쪽)

털북숭이에 옷차림도 형편없고 퀴퀴한 낙타 냄새까지 풍기며 향기 나는 페르시아 최고 사령부를 찾았던 아랍인 사절은, 아랍 정복의 역사에서 무슬림의 형제애를 구현한 영웅으로 찬양되었다. “하느님은 오만하고 거만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니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구현한 인물로 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무함마드는 초강대국에 최초로 모멸감을 주기 2년 전인 632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무슬림 역사에는, 아랍인들이 그들 이전 지배자들(로마와 페르시아)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거만한 자들의 콧대를 꺾고 전투 중에 그들을 살육하며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게 해주신 하느님의) 말씀, 곧 예언자의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 (……) 수 세기 뒤에 글을 쓴 그들의 견해로는, 세계 정복과 세계 정복이 가져다준 유혹을 물리친 것 모두가 무함마드 세대 사람들이 거둔 지고의 업적이었던 것이다.(442쪽)

이븐 알주바이르가 반란 진압만으로 휘청대는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메시지를 칼끝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와리즈도 “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신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이븐 알주바이르와 그의 부관들도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다만 하느님의 심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왔는지를 확실히 알리는 방식으로 표현을 다듬을 필요는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구가 바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자다 Bismallah Muhammad rasul Allah”였다. 피트나가 이라크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685년 혹은 686년 그의 부관들 중 한 사람이 이 문구가 각명된 주화를 페르시아에서 주조한 것이다.(483쪽)

신자들의 사령관도 겸손함으로 위대해진 인물이 아니었던 만큼 그에 대해 이의가 있었을 리 없다. 예언자들의 시대는 끝났을지라도 지상에는 하느님이 선택한 매개자가 계속 필요하리라는 것이 아브드 알말리크의 생각이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수단인 주화를 이용해 ‘신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만천하에 알린 것도 그래서였다. 무함마드가 신의 세계를 알리기 위해 선택된 것처럼 아브드 알말리크도 신의 세계를 해석하여 인류에 전파할 매개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 더 막중한 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제국 주조소의 아브드 알말리크 대리인들이 대중들 앞에 첫선을 보인 ‘칼리프’ 호칭에도, 당연히 지상의 지배자인 것 못지않게 초자연적 영역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 같은 맥락에서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그의 전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하늘로 가는 도로를 지키는 칼리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개골을 박살내는 인물’이었던 아브드 알말리크는, 궁극적인 ‘지도의 이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499쪽)

콘스탄티노플의 궁극적 중요성은 고대 로마제국의 과거와 현재 영토에 관문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보다,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대결을 펼치는 그보다 한층 더 광대무변한 우주적 드라마의 무대라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로마의 수도에 대규모 공격을 가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서, 최후의 가장 위대한 카이사르, 다시 말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제국의 왕 호스로우 2세에게 거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고, 그리하여 아랍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수복하여 그리스도의 복귀를 선도할 정복자로서의 카이사르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은밀히 전파되고 있었다. 무슬림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종말의 날을 만들 기대에 부풀었다.(528쪽)

그러나 물론 모든 것은 변했다. 그것도 철저히 변했다. 그럼에도 티그리스 강변의 역사가 이따금씩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 또한 사실이었다. 이븐 히샴의 예언자 전기에 토대를 제공해준 이븐 이스하크가, 불 주위로 나방이 꼬이듯 아바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발하는 빛에 이끌린 수많은 학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만 해도 그렇다. 그리하여 향후 수십 년 동안 바그다드의 울라마가 기울인 노력으로, 경건한 무슬림들이 그들 종교의 기원을 이해하는 방법의 문제는 확실히 매듭지어졌다. 하룬 알라시드가 황금을 탕진하고 토로스 산의 황무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도 학자들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살아남은 최초의 예언자 전기, 최초의 꾸란 주석서, 최초의 하디스 모음집을 편찬하는 일에 진력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경 요새 몇 곳 점령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항구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칼리프들의 주장을 수 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무력화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순나 편찬자들만 해도 우마이야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아바스 왕조에 대해서도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만큼, 신의 대리인을 거세하려는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거세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누구도 신의 대리인으로 지배할 수 없도록 만든 이슬람의 기원을, 심지어 칼리프마저도 받아들이게 했으니 말이다. 요컨대 울라마는 역사책에 포함될 내용을 엄격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눈부시게 화려하고 복잡한 그들만의 문명의 지식을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549쪽)

그렇다면 다니엘이 예언했던 종말의 날을 이겨낼 것으로 본 고대 후기 사람들의 생각도 틀린 것이 된다. 로마인들의 이교도 제국, 그것을 계승한 기독교 제국, 이스마엘 자손의 제국 모두 결과적으로는 넷째 짐승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시대의 격변에서 그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은 변화의 과정을 통해 지난날의 “모든 왕국들과는 다른” 왕국이 지상에 세워질 것으로 내다보았다면, 그 또한 전적으로 틀린 예상은 아니었다. 카이샤르, 샤한샤, 칼리프는 살아남지 못했지만, 수라의 학교에서 가르친 랍비, 니케아 공의회에서 만난 주교들, 쿠파에서 이슬람을 연구한 울라마는 살아 있는 존재로 지금껏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점에서 21세기에 유일신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수십억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고대 후기에 일어난 혁명의 여파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라 할 만하다.(551쪽)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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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스릴러 작품을 읽는 듯한 재미와 지적 자양분이 듬뿍 담긴 통쾌한 책.”
-≪더 데일리 비스트≫

“홀랜드의 글은 위트와 공감으로 가득하다. 그러한 능력으로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미래 세대들은 터무니없다고 치부할 만한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살았던, 잃어버린 세계의 초상을 그려낸다.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댈러스 모닝 뉴스≫

“허장성세를 일삼는 폭군, 음란한 황후, 통찰력 넘치는 예언자들과 피 튀기는 장면을 곁들여 수정주의 역사관과 스릴 넘치는 필력으로 빚어낸 눈부신 역작. 한번 잡으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책.”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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