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에는 종류가 많다. 이익을 내는 데 충분할 정도로 값싼 화석연료를 확보해야 하는 제조업자들의 안보, 군수 물자를 움직일 석유가 필요한 군대의 안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가정의 안보, 음식 할 때 쓸 땔감을 모아야 하는 시골 농부의 안보, 기후 변화에 따른 농업 파국과 사회 혼란을 막으려고 하는 세계 시민의 안보 등. ‘자원 외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에너지 안보는 대체로 자국에 에너지를 공급하려고 해외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정책을 뜻하는 듯하다. …… 이런 정책은 석유, 가스, 석탄, 핵에너지를 유지하려고 형성된 ‘군사화된 세계 시장’에 관련된다. ― 11쪽
소문자 에너지들과 대문자 에너지는 그저 다른 게 아니라 여러 의미에서 서로 적대적이다. 잘게 나뉜 에너지들이 경제적 가치가 유통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면, 관료, 엔지니어, 통계학자, 연구실, 경제 부서, 발명가, 투자자, 군대 같은 헌신적인 규율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추상적 에너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양적인 ‘성장을 위한 성장’에 사로잡혀 있는 대문자 에너지는 가정의 난방과 냉방, 음식 조리, 전기 조명 같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골칫거리로 여긴다. 불평등하면서 공통의 최저 생활권도 존중되지 않는 세계를 예고하는 셈이다. ― 41쪽
에너지는 기업, 정부, 투자자, 인권 활동가, 환경 운동가, 군대, 과학자, 언론, 노동조합, 소비자를 모두 똑같이 하나로 짜 맞춰 ‘대문자 에너지가 낳은 세계’를 재생산하는 권력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정치적 관계와 경제적 관계들이 얽힌 시스템이다. 대문자 에너지 또는 추상적 에너지에 관련된 어떤 결정도 이런 권력 네트워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에너지는 그 결정의 틀을 짜고, 비판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해결책들을 구성한다. 어떤 발전소를 어디에 세우고 어떤 연료를 선택할지 같은, 대문자 에너지가 이야기하는 일상의 거품들에만 대응하는 방식은 대문자 에너지가 일으키는 여러 문제를 더 악화하고 재생산하는 시스템의 동학에 인질이 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 50쪽
전기를 쓰지 못하는 13억 명에게 겉으로는 대문자 에너지의 틀에서 전기를 공급하려는 많은 프로그램들은 음식 조리와 저장 수단을 사람들의 권리로 보장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시장을 넓히고 노동 생산성을 높이며 근무일을 늘리고 산출물을 더 뽑아내며 민관 협력 사업과 정부의 투자자 보증을 거쳐 사적 분야에 새로 보조금을 주려는 시도로 여겨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농업 연료 또는 석유나 가스 개발 사업은 석유, 가스, 농업 연료를 생산하고 판매해서 수익을 얻는 수단일 뿐 아니라, 공공성보다 기업과 시장의 이익을 우선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신자유주의의 법적 테두리 안에 전체 사회를 가두는 장치다. 에너지 헌장 같은 폭넓은 국제 조약들에 둥지를 튼 투자자-국가 협정은 기업의 이익을 위협하는 새 법률은 무엇이든 ‘수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계약 조건을 부과하는 데 활용된다.
― 85~86쪽
에너지의 금융화는 의사 결정 과정을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에너지가 어떻게 전달될지, 어떤 연료를 사용할지, 누가 혜택을 누릴지 정하는 중요한 결정은 민간 투자자와 기업들의 몫이 됐다. 더 많은 대중이 혜택을 얻고 장기적으로 기후를 보호하는 문제에 상관없이 투자자와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알맞은 인프라가 결정되는 일은 별로 놀랍지 않다. …… 만약 에너지 생산과 사용에서 ‘방향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런 의사 결정에 관련된 민주적 통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우리 앞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권 정치가 있다. ― 142쪽
새로운 무기 구매자들은 중동 석유 생산자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됐다. 1963년에 중동은 국제 무기 수입에서 10퍼센트를 차지했지만, 10년이 지난 1974년에 석유수출국기구의 석유 가격이 치솟자 그 비중은 36퍼센트가 됐다. 새로운 ‘무기 달러-오일 달러’ 연합이 형태를 갖추게 됐는데, 석유로 촉발된 ‘군사화’는 중동 지역에서 증가하는 에너지 갈등의 원인이자 결과가 됐다. ― 153쪽
똑같은 이유에서 중앙 집중식 통제 대상이 되면 될수록, 곧 몇몇 기업이나 정부 부처의 손에 에너지 안보가 더 많이 맡겨질수록, 에너지 시스템은 거대 발전소들하고 서로 연결된 송전망, 수송관, 수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는 사고와 폭풍, 또는 에너지 트레이더나 폭력 집단의 행위에 더욱 취약해질 것이다. 상호 연결의 증가에 따른 ‘위험의 확산’과 시스템 요소 사이의 ‘긴밀한 결합’은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훨씬 취약해지는 길을 열어젖힌다. ― 165쪽
안보라는 용어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여러 의미들 사이를 넘나들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과 관료와 기업 수장들은 양적인 ‘성장을 위한 성장’에 헌신하는 편리한 도구로 안보를 이용한다. 이를테면 더 많은 에너지를 개발한다며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송유관이나 대형 수력 발전 댐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나올 때, 에너지 안보의 모호함 때문에 불을 계속 밝히고 집을 따뜻하게 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쉽게 자극받는다. ― 169~170쪽
산업혁명 때 생겨난 ‘대문자 에너지’가 수백만 명에게서 난방과 조명, 생계 수단에 관련된 소문자 에너지를 빼앗고 있는 것처럼, ‘대문자 안보’는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점차 위험과 불안정으로 이끌고 있다. …… 공적인 토론과 논쟁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제는 에너지라는 순전히 물리적인 개념이 지닌 치명적인 정치적 모호함을 교정하고, 지구 온난화, 화석연료의 채굴 확대 제재, 서로 다른 에너지 자원들의 특성과 유형과 맥락 등을 고려해 사회적 목표를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다. 짚어봐야 할 질문들은 이렇다. 다양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 ‘주거와 식량, 이동, 전기, 생계를 해결하는 정책’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이런 열망들은 자본 축적과 금융 부문의 규모와 소유를 제한하는 문제에 관련돼 무슨 함의를 지닐까? 그리고 그런 논쟁들이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 ‘석유와 석탄, 가스, 핵, 농업 연료에 관한 미래 정책’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 183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