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명의 역사는 만리장성을 하나의 분계선으로 삼아 북쪽의 유목 민족과 남쪽의 농경민족이 대립하고 투쟁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의외로 유목 민족들이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대 왕조를 보아도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비롯해 이들 유목 민족들이 세운 나라가 제법 많이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만 해도 겉으로 보기엔 한족인 양씨(楊氏)와 리씨(李氏)가 세운 나라 같지만, 수나라를 세운 양졘(楊堅)이나 당나라를 세운 리위안(李淵) 역시 한화(漢化)한 유목 민족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현재는 유목 민족과 농경민족의 구분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중국 문명을 가리켜 용광로와 같다는 비유를 하는데, 한때 무력을 앞세워 중원을 침범했던 유목 민족 대부분이 중원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언어도 잃어버린 채 사라졌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에는 50여 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전체 인구 비례로 볼 때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족(漢族)이다. 그런데 사실 한족이라는 개념은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족은 인종적인 개념도 아니고 특정 종교를 중심으로 한 개념도 아닌, 범박한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곧 한족이라는 개념은 유사 이래로 중국 땅에서 살아온 수많은 이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는 가운데 만들어진 하나의 관념 체계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전의 농경민족이니 유목 민족이니 하는 구분들은 이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족’이라는 기표(signifiant)에 갇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 곧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큰 강들은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흐른다. 칭하이(靑海)의 고원에서 발원한 황허(黃河) 역시 그러한데, 특이한 것은 황허의 물줄기이다. 황허는 단순히 동쪽을 향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에선가 북쪽을 향해 방향을 틀어 한동안 북진하다 동쪽으로 흐른 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결국 동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해당 지역의 지형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기 때문인데, 이렇게 황허의 물길 따라 형성된 남북으로 길죽한 평원 지대를 ‘오르도스(Ordos)’라 부른다.
이곳은 기본적으로는 황토 고원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사막과 초원, 염호(鹽湖) 등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광을 이룬다. 100미터가 넘는 엄청난 두께의 황토 고원이 있는가 하면, 사막 안에 느닷없이 푸른 물이 넘실대는 호수가 있고, 그 밖에는 황량한 초원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연 강수량 200밀리미터 정도의 건조 지대임에도 황허의 물을 끌어 대는 관개 수로가 열려 ‘변방 북쪽의 강남(塞北江南)’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풍요로운 농업 지대를 이루었다.
대개 중국의 고대 문명은 흔히 ‘중원’이라 불리는 황허 이남과 양쯔 강 이북 지역에서 발흥했다. 그런데 오르도스 지역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황허의 이북이면서 실제로는 황허의 이남에 해당하는 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바로 이 오르도스를 놓고 북방의 유목 민족과 남방의 농경민족이 뺐고 빼앗기는 싸움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유목 민족들에게는 남방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출구 가운데 하나였고, 상대적으로 중원의 농경민족들에게는 그들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곳을 중요하게 여겨 방어에 힘썼다. 전국 시대에는 이곳에 자리했던 조(趙)나라가 인산(陰山)에 장성을 쌓았고, 이어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당시 흉노족을 북으로 쫓아내고 조나라 장성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삼았다. 한나라에 들어서는 흉노가 세력을 다시 떨쳐 일시 이 지역을 빼앗겼으나, 한 왕조의 국세가 절정에 달했던 한 무제(漢武帝) 때에는 다시 이곳에 숴팡(朔方), 우위안(五原0, 윈중(雲中), 시허(西河) 등 여러 군(郡0을 두어 다스렸다.
하지만 한나라가 망하고 잠시 등장했던 삼국 시대를 진晉나라가 통일한 뒤에는 다시 유목 민족들이 중원에 진출했다. 쓰마씨(司馬氏0의 진나라가 내분에 빠지자, 상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방의 다섯 오랑캐 민족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들 유목 민족의 손에 의해 진나라는 통일 후 36년 만에 망하고, 양쯔 강 이남의 졘예(建業, 지금의 난징)로 도망쳐 동진(東晉)을 세워 명맥을 이어 갔다. 그 뒤로는 북방의 유목 민족 왕조와 남방의 한족 왕조가 대치하는 남북조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때까지 오르도스 지역은 유목 민족이 지배하다가, 수(隋)가 남북조를 통일한 뒤로 다시 한족들이 진출했다. 당(唐) 대에는 여러 주가 설치되었고, 당 말기에는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黨項) 족이 서하(西夏)를 세웠다가 칭기즈 칸에게 멸망당한 뒤 몽골족이 지배했다. 칭기즈 칸은 서역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다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무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 오르도스 북동쪽의 이진훠뤄치(伊金?洛旗)에는 칭기즈 칸의 무덤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이후로는 명 대와 청 대를 거치면서 오르도스는 중국의 변방 지역으로 전락해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통 털어 볼 때, 오르도스야말로 중국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농경민족과 유목 민족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중국 문명을 만들어 냈던 극적인 무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르도스를 만든 것이 바로 문명의 시원이자 젖줄이었던 황허였던 것이다.
_키워드 1 황색, [오르도스란 무엇인가?]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