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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 샘터 | 2000년 12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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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2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03쪽 | 142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46413153
ISBN10 894641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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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20 여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 p.
마음 놓이는 친구가 없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 늙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수십 년 간 사귀어 온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 둘 세상을 떠나 그 수가 줄어 간다. 친구는 나의 일부분이다. 나 자신이 줄어가고 있다.
--- p.282
나도 한 때는 백화나무를 타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꿈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심려에 지쳤을 때, 그리고 인생이 길 없는 숲속과 너무나 같을 때 얼굴이 달고 얼굴이 작은 나뭇가지에 스쳐 간지러울 때 내 눈 하나가 작은 나뭇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 나는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 p.181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5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 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가 하루에 한두 번씩 덥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 주지 못한 비로드 바지를 사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 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점잖고 산뜻한 넥타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하여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 오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5만 원, 아니 10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하다.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 버리지 않고, 나의 마지막 십분의 일이라도 남겨서 자유와 한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젖은 시새를 밟기 좋아한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한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 좋아한다. 새로나온 나뭇잎을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남의 아내의 수달피 목도리를 만져 보기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웃는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p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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