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우릴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 고독을 위한 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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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일상의 삶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일생이 된다. 내게 있어 일상의 소임과 기도, 사람들과의 만남, 기쁨, 슬픔, 좌절의 체험 등은 모두 소중하다. 늘 같은 얼굴이어도 반가운 일상의 언덕길에서의 수도원 자매들과의 인연을 새롭게 감사하며 오늘을 산다.
며칠 전에 파 모종을 했는데 우리가 비스듬히 눕혀 놓은 파들이 비를 맞고 똑바로 일어서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오늘 저녁엔 여럿이 둘러앉아 토란 줄기를 많이 다듬었다. 요즘은 호박잎, 머위잎, 옥수수가 자주 식탁에 나와 반갑다. 밭 냄새, 흙 냄새가 나는 식탁에서는 마음도 더 푸르고 우리의 이야기도 더 소박해진다.
우리 장독대의 100개도 넘는 항아리들이 비에 씻겨 더욱 윤이 나고 깨끗하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연도에 따라 된장, 간장, 고추장, 젓갈류 등의 각기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 우리는 매일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다림의 시간들을 음식에 녹여서 먹는 것일테지.
딸들이 수녀원에 오는 것을 반대하던 엄마들의 경직된 얼굴에도 빙긋이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장소가 곧 장독대인 걸 보면, 항아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힘과 정을 지녔다. '항아리'라는 우리말은 또 얼마나 고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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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한 번 성탄카드를 쓰는 일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부담스런 의무가 아니라 평소에 못다한 인사까지 더불어 챙길 수 있는 흔연한 사랑의 의무, 즐거운 의무여야 할 것이다. 전화와 팩시밀리가 아무리 신속하고 편리해도 고운 카드 안에 정성껏 쓰는 축하의 말을 대신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나도 어느 해인가는 팔이 아프도록 사인을 해서 수백통의 성탄카드들을 독자와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으나 분량이 많다보니 두세줄의 좋은 말을 써 넣기도 여간 힘겨운게 아니었다, 좀더 긴 글을 써서 복사를 해서 보낼까도 생각했으나 친필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정감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또 몇 통의 카드를 받게 되고 또 보내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보낼때는 우선 어린이, 장애인, 수인들, 일반독자, 가족, 친지등의 순서대로 쓰려고 나름대로 정해놓고 있다.
내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내가 이웃에게 자신을더 많이 내주어야 할 사랑의 빚쟁이임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수많은 카드와 편지들, 이들 앞에 약간은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새로운 고마움으로 내 마음엔 환한 꽃들이 켜진다.
그리고 카드 속에 쓰여 있는 모든 좋은 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말들이 내 삶의 길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노력하리라 다짐해본다.
비록 어느날 내게 더 이상 많은 카드가 오지 않고 내가 보내지 않더라고 행복하고 충일한 삶의주인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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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언제나 내 그림움의 대상이다. 강이나 바닷가의 모래밭에 찍힌 물새들의 가늘고 조그만 발자국들을 보면 그 자리에 새가 없어도 반갑고, 지금쯤은 그 새가 어디에 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마음이다.
어떤 분의 수필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어디에 쉴 곳이나 제대로 있는지 측은히 여겨진다'는 구절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새들은 항상 자유의 상징으로 부각되지만 새들 하나하나는 자유로운 그만큼의 고독을 안고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도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이기적인 욕심이나 미움, 절망의 어둠 속에서 갇혀 있다고 생각될 때 문득 하늘의 새들을 그리며 기도하면 밝아지는 기분이 되곤 한다.
--- p. 17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아무래도 나는 가망이 없구나' 한숨 쉬며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는 슬픈 결심을 해본다. 지키지도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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