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기록들[일본정부의 공식 문서들]을 근거로 한 이토의 보호통치는 끝까지 한국병탄을 의도하지 않았고, 그가 통감으로 실시한 지배정책을 “자치육성정책”으로, 또는 그를 “문명의 사도”로 평가하고 있다. 이토는 보호통치를 통해서 “한국인의 문명도가 높아지고 자치능력을 구비하여 의회정치가 뿌리를 내리는 날에는 한국 재(再)독립의 길이 열려 진정으로 일한동맹이 구축될 것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토가 최종적으로 병탄에 동의한 것은 한국인이 문명화와 식산흥업이라는 “보호”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하고 저항했기 때문에 초래한 불가피한 결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의 이토 암살은 병탄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한반도 지배는 메이지 일본이 들어서면서부터 내세운 가장 중요한 “국시(國是)”의 하나였고,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른 것도 결국 그 국시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이토는 한국인의 “열복”과 열강의 지지를 받으면서 국시를 실현하기 위하여 보호통치의 명분으로 문명, 계몽, 식산흥업, 독립, 자치능력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문명의 탈을 쓴 근대적 법과 제도, 군사력, 그리고 정보와 사법기관,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기(器機, apparatus)”와 “권력의 그물망(web of power)”에 의존한 비문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였다. 그리고 물질적 황폐함은 물론이고 정신적 왜곡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화의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토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에필로그」중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폐멸’을 주도했다. 그가 ‘한국[조선] 문제’에 직접으로 깊숙이 관여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부터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統監)의 직위에서 물러난 1909년에 이르기까지 4년이 채 안 된다. 그의 긴 정치와 관료 생활에서 본다면, 대단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이토는, 을사5조약과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유사(有史) 이래의 숙제이고 유신(維新) 이래의 현안”인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가능케 만든 인물이었다. 이토는 마지막 정치활동의 3년 반 동안에 대한제국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고, 한민족의 민족성과 언어와 역사를 지우고 일본민족에 동화시키려고 한, 35년 동안 지속된 식민지지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얼빈에서 이토의 죽음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근현대사와 한일 관계사에 짙고 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토의 죽음은 일본이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준비해온 대한제국 병탄의 명분과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제국은 이토가 하얼빈에서 쓰러진 지 열 달 만에 어렵지 않게 한반도를 병탄할 수 있었다. 병탄은 이토가 한국 초대 통감(統監)으로 3년 반 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후 이어진 35여 년의 시간은 한민족에게 긴 고통의 암흑시대였다.
이토의 죽음 이후 일본의 역사 또한 어둠의 길로 들어섰고, 그 근본 씨앗은 이토가 주도한 천황제(天皇制) 헌법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이토와 같이 군대와 관료를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통솔할 수 있었던 강력한 원로(元老) 집단이 국가경영을 담당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토를 위시한 원로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천황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군부의 군통수권 독립을 정치가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그것은 패망과 주권 상실로 이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떠나 근대 일본사를 생각할 수 없듯이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떠나 한일관계사를 논할 수 없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 이토의 출생에서부터 하얼빈에서의 죽음까지 전 생애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토는 메이지 국가건설에서 관여하지 않은 영역이 없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를 남기고 있으나, 이 책은 이토가 정상의 위치로 올라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의 조선[한국] 문제, 그리고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그의 구상과 역할에 국한하고 있다.
---「프롤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