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면서, 이것을 전공한답시고 보낸 세월이 어느덧 이순
(耳順)의 고갯마루를 넘는 나이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한국의 신화를 정리하기 위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이루어 놓은 성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신화 자료들을 체계화하려고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 그리하여 1980
년대는 구조주의의 공부에 몰두했었고, 1990년대는 민족학(民族學)의 공부에 전념하다시피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공부한 것은 필자 나름의 필요에 따라서였다. 곧 활발하지 못
했던 무가(巫歌)를 신화학의 처지에서 정리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분석 방법이 합당한 것
같았고, 한국 신화의 원류를 밝히는 데 민족학에 사용되었던 문화사론적인 연구 방법이 제
격인 것 같았다.
그 연구 성과가 바로 이 책이다. 이것은 한국의 신화 자료가 어디로부터 어떤 문화와 함께
한반도로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테마를 염두
에 두고 그 동안에 몇 편의 논문을 써서 학계에 발표를 해왔기 때문에, 이들 논문을 체계적
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먼저 한국 기층 문화의 성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땅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출현 신화와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 준 곡모신 신화, 타살된 시체로부터 곡식의 씨앗을 얻었
다고 하는 시체 화생 신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동안 한국의 학계에서는 이들 신화
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소 무리한 추론이 전개되었을는지도 모
른다.
하나의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
에서 일본 학자들의 편향된 한국 신화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는 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
다. 특히 출현 신화에 관한 연구는 일본의 학자들이 도외시하던 자료를 찾아내어 그 관계
를 해명하려고 했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 다음으로 지배 계층의 교체 과정을 서술하는, 한 무리의 신화들을 고찰하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료들로는 해부루의 동부여 양도 신화와 송양왕의 비류국(沸流國) 양도 신화, 비
류(沸流)의 미추홀 양도 신화를 들 수 있다. 이들 신화는 뒤에 들어온 집단에게 평화적으
로 나라를 물려주고, 건국의 주체가 비정상적인 탄생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지막으로 지배 계층의 자료에 들어가는 것으로는, 왕권의 기원을 하늘에서 찾는 천강 신
화와 햇빛의 감응으로 건국주가 태어났다고 하는 일광 감응 신화, 그리고 짐승을 조상으로
하는 수조 신화(獸祖神話), 알에서 태어난 존재가 왕권을 장악하는 난생 신화 등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천강 신화와 일광 감응 신화는 상당량의 선행 연구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미
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가, 한국에서는 그 예를 찾지 않았던 수조 신화에 대한 연구를 덧
보태어 한국 문화 속에 남아있는 수렵․유목 문화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또 난생 신화의 연구에서는 종래의 가설, 즉 난생 신화는 남방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미
시나의 견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한 까닭은, 그의 연구가 일제 강점기에 행해
졌던 분할 통치를 뒷받침하려는 저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에서
는 이에 대한 검증과 비판을 하지 않은 채, 난생 신화의 남방 기원설을 그대로 수용해 왔
다. 이제 우리도 좀더 치밀하게 일본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집필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소 논리의 비약이 있
고, 자료의 이용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선후배들의 기탄없는 질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수정을 할 생각이
다.
끝으로 본 연구 계획을 평가하여 연구비를 지원해 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관계자들께 감사
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흔쾌히 출판을 허락해 주신 지식산업사의 김
경희 사장님께 충심으로 고마운 뜻을 전하며, 또 원고를 치밀하게 읽고 꼼꼼하게 교정을 해
주신 출판사 편집부의 김상연 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05년 7월 7일
영남대학교 인문관 연구실에서 필자 씀
---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