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커스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속편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고심하다가, ‘클론의 습격’이라고 정했다. 사실 그보다 더 부정적이고 위협적이고 몸서리를 치게끔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제목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클론’이라는 단어를 접하기만 해도 우리 머릿속에는 온갖 영상들이 떠오른다. SF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그런 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름도 표정도 지성도 없는 유사 인간들이 행군하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에서 복제라는 꿈은 거의 언제나 악몽으로 그려진다......
신화, 문학, 영화에 담긴 강력한 이미지와 비유는 복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파고들고 우리의 반응을 물들인다.(p17)
과학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순간은 극히 드물다. 과학은 주로 꼼꼼하고 고역스럽고 품이 많이 드는 연구와 앞선 사람들이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뉴턴의 명언은 분명히 옳다. 과학자들은 선배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 말이다. 새로운 깨달음이 한 분야에 큰 발전을 가져오긴 하지만, 그 발전에는 대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얻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검증할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p78~79)
줄기 세포 연구만큼 과학자들과 대중의 기대감에 불을 붙인 경이로운 의학 기술은 없을 것이다. 배아 줄기 세포는 아주 작은 초기 배아에서 생긴다. 이 세포는 모든 유형의 세포로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질병이나 손상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는 조직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그 세포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발달하도록 이끄는 신뢰할 만한 성장 인자들을 찾아낸다면, 언젠가는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의 세포 하나하나를 대체하여 보수하고, 조직공학을 이용해 우리 몸의 장기 하나하나를 수선할 수 있다.
인간의 배아 줄기 세포는 어떤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변신하는 카멜레온, 불로장수약 같은 것들 말이다. 게다가 그런 비유들은 딱 들어맞는다. 아직 많은 사람들은 이 세포들을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근원적인 세포이다. 젊음의 유연성이 절정에 달한 상태인 이 세포들은 발생하는 초기 배아에서 나타나며, 배양 접시에서 영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제대로 배양하기만 하면 계속 분열하고 성장한다. 과학자들은 이 세포들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게 비밀을 풀고자 애쓰고 있다. (p142~143)
과학자나 의사가 질병, 장애, 때 이른 죽음을 빚어낼 위험을 무릅쓰고서 인간 복제의 선구자가 되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까? 당연히 옳지 않다. 내가 아는 존경할 만한 복제 과학자들은 모두 현재의 지식과 경험 수준을 고려할 때 인간을 복제하는 것은 지극히 비윤리적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안전성 문제가 해결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랬을 때 복제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한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복제 윤리를 어떤 식으로 살펴보아야 할까?
이 분석에 착수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번식용 복제를 휘감아 흐릿하게 만드는 윤리라는 안개를 깨끗이 걷어내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복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라. 나는 실제로 해보았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불안해하고,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들에게 클론은 위험하고, 피해를 입히고, 심지어 사악한 듯이 보인다. 클론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거나 더 악하게 비친다. 자신을 복제하려는 사람들은 경멸을 받는다. 문학과 영화들이 그런 생각을 품게끔 부추겼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저녁 뉴스도 그에 못지않게 기여를 했다. (p185~186)
최초의 복제 인간은 익명성이라는 장막 뒤에 숨지 않으면, 대단히 힘든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 세계가 돌리에게 보인 반응과 그 반응이 이끌어낸 행동들을 떠올려보라. 돌리는 신기한 구경거리, 언론의 슈퍼스타로 대접받았고, 적어도 초기에 언론의 조명을 피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대단히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 새끼인 보니를 출산한 뒤에야, 돌리는 좀더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명성이 있었기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많은 양들과 함께 외양간에 갇혀 지내야 했다. 돌리를 죽인 원인이 단지 폐 감염 질환이 아니라 클론이라는 명성 때문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p206)
설령 볼프강 II가 작곡을 한다고 해도, 모차르트처럼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42번 교향곡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음악 문화는 사라지고 없다. 모차르트가 대처했고 통달했던 도전 과제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다. 아마 볼프강 II는 록 음악가가 될지 모른다. 어떻게 될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가 환경과 유전의 영향으로 구성된 고도로 복잡하고 독특한 집합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p239)
내 소파 위에 걸려 있는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복제품이라면, 사람들이 구경하겠다고 집 모퉁이를 빙빙 돌아 줄까지 선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 복제품도 입을 쩍 벌린 채 쳐다볼 관광객들을 별로 불러모으지 못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길을 좀더 올라간 곳에 있는 아카데미아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있는 조각상에 무심한 이유는 뻔하다. 극히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그리스 조각상이나 작품을 모방하여 성당 안이나 문 앞에 설치한 로마 작품들), 원본, 즉 진짜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사본, 모조품, 가짜에 불과하다. 진짜를 쓸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대체품이다. 예술 작품의 사본은 원본보다 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 그리고 사본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든 간에 그것은 고유의 특징과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원형과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클론은 단지 원본의 사본이 아닐 것이며, 사실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클론이 사본이라는 생각은 복제 이야기의 중심지에서도 엿보인다. 돌리를 복제한 연구진을 이끌고 있는 이언 윌머트는 번식 목적의 인간 복제 개념을 혐오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종종 그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 그는 “인간을 복사하다”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사될 수 없다. 우리의 거울상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편에서 삶을 얻지 못한다. 원본에서 얻은 세포 하나로 새로운 사람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저 유전체를 복제하는 것일 뿐이다. 클론은 나중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다. 클론이 원본보다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복사라는 비유는 쌍둥이보다 클론에 더 적용되기 쉽지만, 그 말은 쌍둥이에게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론에 쓸 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마 복제에 관한 오해 중 가장 심각하고 해로운 것은 유전적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과 같다고 보는 생각이다. 그것은 정말로 오해이다. 심지어 하체를 함께 쓰고 그에 따라 외부 환경도 똑같은 이른바 샴 쌍둥이(몸이 붙은 쌍둥이라고 해야 더 맞다)도 성격이 서로 다르다. (p242~243)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