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항상 모자라는 일손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이후 모든 가게운영을 어머니 혼자 감당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처지에 있었으면서도 어머니는, 이웃의 남정네들과는 철저한 단절을 두었고, 아낙네들끼리라도 야단스런 교류를 하지 않았다.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는데도 지병 하나쯤은 앓아가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약도 쓰지 않았다. 소모적인 감정발산을 최대한으로 절제하려는 그 이면에는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모멸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닦달하느는 일만은 매우 따끔한 편이었는데, 그것은 애비 없이 자란 버릇없는 자식이란 평판을 들을까 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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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읍내의 그 술집 여자를 만나고 왔다는 것조차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끝내는 아버지를 떠나기 위해 내게서 삼례를 훔쳐간 것이었다.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가장한 어머니의 신발자국은 두 번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를 아버지가 아닌 내게 은밀하게 귀띔한 것이었다.
--- p.293
아버지는 눈의 궁전에서 찾아온 눈의 사자인지도 몰랐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너무나 많은 눈이 내려 있었다.
--- p.292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바로 이튿날,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어머니의 가슴속에 6년 동안이나 간직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아침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던 폭설로 말미암아 모두가 허상으로 침몰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 p. 293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비단과 향수, 그리고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거친 바람이 흩날리는 초원에 마련될 것이다.
--- 작가의 말중에서
그해 겨울 초입부터 어머니는 가오리연을 만드는 대신 조각보를 짓기 시작했다. 옷이나 버선을 마름질하고 남겨두었던 젖먹이들 손바닥 같은 자투리 천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방 한 켠에 있는 반짇고리에 쌓아두기만 했던 그것들을 뒤적여 이리 붙이고 저리 덧대어 한땀 한땀 촘촘하게 기워 나가는 그 반추의 바느질은, 시간과의 약속을 다툴 수 없는 지루하고 고독한 작업이었다. 한 벌의 삯바느질감이 완성되어 손에서 떨어지는 사이사이에 어머니는 짓다 만 조각보를 꺼내들곤 했었다. 산비탈을 타고 다닥다닥 올려 붙은 다락놀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 조각보들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어머니의 직선적인 시간들을 나선형의 시간들로 구부려 주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그것은 사람들이 가오리라고 말하기도 하는 홍어(洪魚)였다. 언제나 부엌 문설주에 너부죽하게 꿰어 매달려 연기와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있던 말린 홍어가 보이지 않았다. 하찮은 홍어포 한 마리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겐 내가 열 살 되던 해부터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로 상징될 만한 건어물이었다. 그것이 매달려 있는 자리가 항상 부엌 문설주 였기 때문에 부엌문을 열고 닫는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는 좋든 싫든 홍어포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 p. 19
- 나는 어느새 콘도르가 되어 구름낀 밤하늘을 유유히 선회하고 있었다. 내 온몸은 고공의 기류가 뿜어내는 혹한을 막아낼 수 있는 두툼하고 긴 깃털로 촘촘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낮게 드리운 구름을 꿇고 높디높은 하늘 한가운데로 몸을 솟구쳤다.
- 고개를 드는 순간 금방 눈뿌리가 시려왔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마을과 들녘은 온통 눈나라가 되어 있었고, 산기슭의 나무들에는 상고대가 때으르게 핀 목력처럼 흐드러졌다. 뜰과 골목길과 새로 손질한 담장의 이엉위로 눈무더기가 누가 한자루 쏟아 붓고 자취를 감춘 듯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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