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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명작 기행

독일 명작 기행

: 중세에서 현대까지 독일 고전 명작들과 함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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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599쪽 | 674g | 153*224*35mm
ISBN13 9788994054681
ISBN10 899405468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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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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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에 의해 촉발된 애국 감정은 독일 민족의 기원과 신화가 담긴 『니벨룽겐의 노래』에 대한 열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괴테는 ‘이 서사시는 국민이 어느 정도의 교양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니벨룽겐의 전설은 이후 바그너에 의해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수용되어 19세기 후반 독일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토마스 만은 [니벨룽겐의 반지]의 영향으로 4대에 걸친 어느 가문의 몰락을 그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집필한다. 여기서 구(舊) 부르주아 부덴브로크 가와 대립하는 신흥 부르주아 하겐슈트룀 가는 군터의 충직한 신하 하겐을 상기시킨다. --- p.20

이 영웅서사시가 쓰인 것은 중세 독일 문학에서 적절하고 잘 다듬어진 교양과 몸가짐이라는 ‘궁정’ 덕목이 강조되던 때였다. 격정을 드러내고 복수와 명예를 철저히 강조하는 내용의 『니벨룽겐의 노래』는 이 시기와 대조적으로 이전 시대를 반영하는데, 게르만 대이동기의 영웅설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시의 바탕이 되는 주제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르군트족의 멸망을 다룬 이야기는 437년경 훈족이 보름스의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킨 것에서 소재를 얻고, 브륀힐트와 지크프리트의 이야기는 600년경 프랑스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역사에 나오는 사건에서 소재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서사시에는 설화 본래의 영웅적 성격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하겐을 엄격하게 군터 왕의 명예를 지키는 사람으로 그린 데서 잘 나타난다. --- p.26

시인 하이네는 『니벨룽겐의 노래』에 매혹되었다고 하면서도, 괴테와는 달리 이것은 ‘돌 같은 언어이고, 시구는 운을 맞춘 마름돌 같다’며 그 음조에서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헤겔 역시 강의에서 유사한 판단에 도달한다. 쇼펜하우어도 『니벨룽겐의 노래』를 『일리아스』와 비교하려는 시도를 신성모독으로 여긴 것 같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독일 애국자들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작가 곁에 세우는 것을 경고했다. 이런 몇몇 비판에도 불구하고 니벨룽겐 소재는 19세기에 시대정신을 담보하는 개념이 되어 국민 서사시의 위치에 도달했다. 이처럼 이 소재는 18세기 말까지는 고대의 진품 정도로 몇몇 소수만 알고 있었지만, 19세기 초에 와서 정치적인 여러 사건의 결과 오랫동안 암흑에 가려 있던 민족문학의 가장 숭고하고 완벽한 기념비가 된다.--- p.29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보다 2년 앞서 발표되었다. 이 비극은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상연되고 있으며, 18세기 독일 문학 중 가장 많은 논란이 된 작품이다.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단순히 한 가정의 비극을 그린 가정극인가, 아니면 전제군주의 횡포를 비판하는 정치극인가 하는 문제이다. 혹자는 아버지가 딸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이 도덕적 정치적으로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거기서 신의 섭리도 찾을 수 없고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열린 결말은 자유 의지의 문제, 이성과 감성의 조화, 시민계급의 도덕성 등 여러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레싱의 희곡이 고대인의 그것과 비교해서 뛰어나지 못하다면 그것은 시대가 더 나은 소재를 주지 않은데다, 시대가 그만큼 열악했던 탓이라 할 수 있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기원전 5세기 로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아우구스트 황제시대의 역사가 리비우스(B.C. 59-)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p.35

독일 문학사에서 대표적 시민비극인 『에밀리아 갈로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토대로 한 레싱의 『함부르크 극작론』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레싱은 처음에는 주로 연기자의 연기에 관한 평론을 쓰다가 차츰 본격적인 드라마 이론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러한 글들을 모아서 발간한 책이 『함부르크 극작론』이다. 레싱은 『함부르크 극작론』에서 규범 시학을 비판하고 연극 실무와 관련된 비판적 성찰을 하여 새로운 드라마 평론과 이론의 기초를 확립한다. 레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공포’, ‘연민’, ‘정화’의 이론을 수용하면서, 작품의 무대나 등장인물의 신분을 귀족이나 궁정에만 국한시켰던 종래의 비극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레싱은 공포의 의미를 타자에게 일어나는 불행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인 공포(Schrecken)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생겨나는 두려움인 공포(Furcht)로 바꾸어놓는다.--- p.43

괴테는 시를 쓰는 동기와 소재가 현실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현실주의 작가이다. 그는 위대하고 유익하며 명랑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을 선호했다. 그는 작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것 말고도 시와 희곡, 소설을 망라한 문학의 전 장르뿐만 아니라 문학 및 미학 이론, 심지어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으며, 오랫동안 공직에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펼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대표작도 희곡, 소설, 시, 기행문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연구서인 『색채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하다. 특히 그는 뉴턴의 기계론적 색채 이론과 대비되는 생태론적 입장을 취하는 『색채론』을 쓰고 자신의 색채론은 독창적이라서 자신의 불멸의 업적이며, 자신만이 이 위대한 자연의 대상에 관하여 “수백만 중에 올바른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호언장담까지 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언제나 진실하고 진지하고 엄격하고 옳으며, 결함과 오류는 인간의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그는 순수하고 영원한 자연의 진리를 파당적 견해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그리고 뉴턴의 이론은 순수한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쳐부수어야 할 ‘바스티유의 요새’라며 적대 감정을 숨기지 않는 점에서 헤겔을 공격하는 쇼펜하우어의 태도를 보는 듯하다. 괴테의 색채론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도구적 이성과, 문명의 자기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면서 일부 물리학자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에 의해 하나의 대안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p.62

사실 『시와 진실』에 따르면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쓰인 직후 바로 파기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괴테가 친구 메르크에게 사랑의 편지를 낭독해주었는데 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괴테는 소설의 주제나 음조, 문체 면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만약 옆에 난로가 있었다면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메르크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니콜라이라는 작가는 자살을 옹호하는 그 작품에 거부감을 보여 『젊은 베르터의 기쁨』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작가 렌츠는 주인공이 자살했다고 괴테의 작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매도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분노와 불화, 적의를 유발한다고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p.74

우리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괴테가 전하고자 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르터는 직업 활동을 하면서 시민계급의 제한된 환경에 갑갑해하며 그것을 감옥처럼 느낀다. 그래서 공사와 불화를 겪은 것에 대해 공사관에서 직업 활동을 한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는 자아와 자연의 상태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규칙을 거부하는 질풍노도기 천재들의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적 세계관을 무시하고 감정이나 마음, 열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적 인간의 입장에서 사회적 활동보다 고독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는 지식의 축적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즉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내 마음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p.78

『도적들』은 1781년 여름 자비로 출판되었다. 게다가 실러가 다닌 사관학교에서는 학생이 책을 출판하려면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돈을 빌려 익명으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실러는 그 후 출판비와 생활비에다가 그 이자 때문에 오랫동안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실러는 책의 정식 출판을 위해 출판업자 슈반에게 내용의 일부를 보냈지만, 고상하고 예의바른 독자가 보기에는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거부당했다. 그러나 슈반은 만하임 국민극장 극장장 헤리베르트 폰 달베르트를 소개하면서 상연에 부적합한 표현을 고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81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달베르크와 다른 전문가의 실질적인 제안으로 무대용 대본이 생겨났다. 그러나 달베르크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인습적인 연극 취향에 맞추고, 될 수 있는 한 실제 정치 상황과의 비교를 피하기 위해 연극 대본을 다시 대폭 수정했다. --- p.89

시를 즐겨 읽는 문학 소년인 실러는 사관학교 시절 루터의 성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애독했고, 베르길리우스, 클롭슈토크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볼테르, 루소, 괴테 등의 작품을 읽었다. 특히 그는 심리학 교수 아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위대함의 이념, 천재 그 자체였다. 그는 위대한 정신은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교육되는 것인지, 또 그런 사람들의 표식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다. 생도 시절에 실러는 은밀히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 나온 시와 소설, 에세이와 희곡을 열심히 읽었고 희곡 창작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대공 오이겐의 눈을 피해 생겨난 희곡이 『도적들』이다.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은 낮에는 자유가 없고 밤에만 마음대로 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실러는 상상력이 나래를 펴는 고요한 밤 시간에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다. 사관학교에서는 일정 시간이 되면 소등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실러는 부속 병실의 등불을 이용하기 위해 가끔 병 계출(屆出)을 냈다. 가끔 카를 대공이 병실을 순시할 때는 『도적들』의 원고를 책상 밑으로 숨기고 미리 준비해둔 의학책을 보는 척하기도 했다.--- p.93

1782년에 쓰기 시작하여 1783년에 집필이 끝난 실러의 『간계와 사랑』은 다음 해인 1784년 4월 13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후 4월 15일 만하임에서 공연되었다. 이 시민비극은 18세기 중엽 독일 어느 영주의 궁정과 시민계급의 집을 무대로 귀족과 시민계급 사이의 신분을 뛰어넘는 연애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소재는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비르기니우스 전설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영주가 순박한 시민 처녀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과정이 묘사되는 『에밀리아 갈로티』와는 달리, 『간계와 사랑』의 페르디난트는 귀족이지만 시민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이다. 그는 자신의 계급을 이탈하여 귀족계급을 비판하고 시민계급의 가치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원래 제목이 ‘루이제 밀러린Luise Millerin’인 이 희곡은 만하임 극장의 배우였던 이플란트의 제안으로 『간계와 사랑』으로 개칭되었다.--- p.106

독일의 시민비극은 계몽주의 시대와 질풍노도기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영주나 귀족과 시민계급의 대립에서 생기는 여러 현상에 주목했으며, 특히 계급적 편견과 인습적 결혼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다. 귀족과 시민이 대립하고 그 사이에 연애관계가 끼어들면 대립구도가 악화된다. 그로 인한 종국의 파탄은 대체로 두 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는 귀족이 시민에게 폭력을 가해 시민이 참변을 당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귀족 자신이 주위의 반대와 음모로 파멸하는 경우이다. 『간계와 사랑』은 귀족과 시민이 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이다. 순수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 비열한 사람들 때문에 파멸하는 타락한 사회에 대한 의분에서 쓰인 이 시민비극에서는 죄악과 간계로 가득 찬 궁정생활과, 교양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나 윤리적으로는 더 우월한 시민계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p.113

텔이 등장하는 역사책 가운데 하나인 『동맹의 노래』에서는 명사수인 빌헬름 텔이 발트슈테테 지역의 독립투쟁을 돕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자르넨의 『백서』에서는 텔을 동맹의 창시자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다룬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명도 나오고 텔의 노래에서는 익명이었던 태수가 ‘게슬러’로 나온다. 이 소재가 처음으로 극화된 것은 『우리 주의 텔 놀이』이다. 이 작품에서는 역사책에서와는 달리 텔이 멜히탈, 슈타우파허와 함께 동맹의 창시자로 나온다. 실러가 이 작품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독일 문학 사상 최초의 정치적 연극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실러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여러 역사서를 참고했으나, 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스위스 독립 투쟁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을 희곡 기법상 축소 혹은 확대하면서 빌헬름 텔의 운명을 좀 더 부각시켰다.--- p.125

실러의 『도적들』, 『간계와 사랑』과 『빌헬름 텔』은 비록 200년 전의 작품이지만 지금도 현실성과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실러는 시대를 앞서 여성의 실제적 가치를 보여주며 여성이 지닌 덕목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루이제는 죽으면서 자기를 죽음에 몰아넣은 페르디난트를 용서하는 숭고한 모습을 보이지만, 수상과 서기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치졸한 모습을 보인다. 『빌헬름 텔』에서 태수들의 폭정과 탄압에 맞서 봉기에 나서라고 슈타우파허의 결단을 촉구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 게르트루트이다. 그리고 스위스 국민을 배반하고 오스트리아 편에 선 루덴츠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도 그가 연모하는 베르타이다. 한편 권력자 게슬러는 텔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열등감을 느껴 감옥에 가두기로 하는 점에서 강자가 아니라 약자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사회의 소통 부재, 정치적 탄압,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야기된 여러 시위나 사회 변혁 운동, 재스민 혁명과 같은 시민혁명을 보면, 실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핵심 문제가 모습만 약간 바뀌었을 뿐 현재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p.135

하이네는 『겨울동화』를 그의 독일 여행에 대한 사적인 회상으로 작성하지 않고 오히려 독서 대중을 의식하고 텍스트를 작성한다. 그에게 대중에 대한 작가의 관계는 이중적인 방향으로 일어난다. 한편으로 작가는 대중의 잠복적인 혹은 공공연한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의 기대를 무시하고 의식적으로 반대 행동을 취한다. 독자와의 관계에서 그런 양면감정이 『겨울동화』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겨울동화』의 기본 주제는 낭만주의로 분장된 프로이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화자는 하이네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화자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만난 복고의 상징들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 수단으로 쓰인 것이 하이네가 초기 시 이래로 발전시켜온 아이러니이다. 하이네는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가볍고도 매끈하게 제시된 정다운 무리를 마지막에는 가상으로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즐겨 감동에서 냉엄한 현실로 회귀한다. 즉 그의 시의 낭만적 정취는 흔히 환상적 분위기를 파괴하는 반전과 돌연한 극적 아이러니로 나타난다. 하이네는 낭만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바로 낭만주의의 아이러니를 역이용한다.--- p.143

『독일. 어느 겨울동화』는 이처럼 격렬한 논쟁과 상이한 평가의 대상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매우 독특한 수용사를 지니고 있다. 독일의 국수주의자나 보수주의자에게 이 『겨울동화』는 처음부터 순전히 넝마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치나 카우프만과 같은 사람은 『겨울동화』를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에 버금가는 인류의 걸작’이라고 극찬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이래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제목의 비판적 시를 써왔다. 즉 1846년에 라인하르트는 『슈베린. 어느 여름동화』라는 시를 쓴 바 있으며 현대에는 구동독에서 망명한 볼프 비어만이 『독일. 어느 겨울동화』라는 동명의 시를 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 작품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p.162

뷔히너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1823년 학교의 축제일을 맞이하여 “과일을 먹을 때 주의하세요!”라는 라틴어로 된 글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낭독한 이래, 1827년과 1828년의 크리스마스에는 부모에게 헌시를 바쳤다. 1830년에는 자신이 다니던 김나지움의 어느 공식 축제를 맞이하여 ‘우티카의 카토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뷔히너는 카이사르가 통치하는 한 민중은 노예로 살아갈 것이므로 자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카토가 전투에 패한 후 자살을 했다고 보았다. 이것은 프랑스의 7월 혁명을 맞아 뷔히너가 민중의 자유를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공식적인 정치적 행동이었다. 1831년에는 김나지움 졸업식을 맞아 ‘메네니우스 아그리파의 이름으로 산상에 모인 민중들이 로마로 돌아갈 것을 라틴어로’ 권유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절대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정치적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여, 1833년 4월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p.166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이미 뷔히너는 ‘열린 형식의 연극’으로 작품을 썼다. 지금은 열린 형식, 곧 결말을 맺지 않은 양식의 연극을 개방 형식의 연극이라 부르고, 고전주의나 자연주의 양식에 의해 3막, 5막 등 완결을 보는 연극은 폐쇄 형식의 연극이라 하는데, 19세기에 이미 열린 형식의 희곡을 남긴 뷔히너는 탁월한 작가임이 확실하다. 전통적 폐쇄 형식은 하나의 사건이 인과율에 따른 기승전결의 구조로 발생하고 종결되지만, 개방 형식은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는 여러 개의 개별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뷔히너의 희곡은 세 편뿐이지만 이 작품들은 독일의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뷔히너는 독일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자연주의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하우프트만, 예술가와 지식인의 환멸을 표현한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 서사극의 작가 브레히트 등이 뷔히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독일 연극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p.172

『보이체크』의 등장인물들은 대위, 박사처럼 직위만을 가진 부류와 보이체크, 마리, 안드레스 등 이름으로 표시되는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위로만 불리는 인물은 개성을 상실하고 직업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하므로 대위와 박사는 인간적 개성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신분적 성격의 가면을 쓴 인물들이라는 점이 암시된다. 그들은 사회적 배경 역할을 하므로 개인적인 이름 없이 박사, 대위라고만 불리며, 나머지 인물들은 보이체크와 같은 하층계급에 속한다.--- p.177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이처럼 에베르파가 처형된 후 당통마저 처형될 때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제1막에서 당통, 데물랭, 다른 사람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내세운 공화정 이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한다. 민중 사이에서는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자 불만이 팽배해진다. 한 시민은 자신의 딸이 몸을 팔아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탄식한다. 당통파가 혁명의 성과를 위협한다며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당통파를 숙청할 계획을 말한다. 당통은 노름과 창녀들에게 빠져 앞날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품지 못한 채 자신에 대해 구역질을 한다. 당통은 자신의 동료들이 로베스피에르와 회동을 가지자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결과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난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처형을 결정하지만 이로 인해 가책을 받고 괴로워한다.--- p.189

뷔히너 역시 생쥐스트처럼 폭력을 통한 혁명의 필연성에 공감하는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민중의 궁핍 해결을 혁명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당통의 죽음』에서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정적제거와 권력유지를 위해 무차별적인 대량살상을 자행하는 생쥐스트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한다.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항상 인간해방의 가능성과 열려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방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p.199

쇼펜하우어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1854년은 공교롭게도 쇼펜하우어가 하찮게 평가하고 싫어한 철학자 셸링이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친구 페트 센신에게 ‘쇼펜하우어가 인류 중에서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며 그를 극찬하는 편지를 쓴다.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니체는 장차 쇼펜하우어가 헤겔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일찍부터 쇼펜하우어 철학을 정확히 이해한 아인슈타인은 그의 책에 영감을 얻어 상대성 이론을 구상했다고 한다. 또한 작가 보르헤스는 자서전에서 ‘오늘날 내가 단 하나의 철학자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쇼펜하우어를 택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p.207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머리말에서 독자에게 칸트 철학을 먼저 읽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칸트 철학에 대해 먼저 간략히 설명하는 게 필요하겠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칸트에게 와서 현상과 사물 자체 간의 차이로 반복된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현실에 대한 직관, 경험과 인식은 사고력으로 주장되는 초월적인 질서형식 속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사유는 초월적인 종합이며 사유의 질서 원칙을 통한 경험적 소재의 질서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학설에 의하면 경험적 현실세계는 비본래적이고 비본질적인 존재로 이해되며 그 배후에 본래적인 본질적인 존재가 숨어 있다. 경험적 사물들은 변화하며 무상한 반면 그 개념들인 이념은 불변하며 영원하다.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험적 사물세계의 존재는 다만 가상에 지나지 않고, 본래적인 본질적인 존재는 이데아의 존재이다. 이데아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존재의 진리인 반면 사물의 현상들은 다만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영원한 이데아가 일시적으로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p.208

쇼펜하우어가 주된 관심을 가지는 의지의 세계는 살아있는 자연의 세계이다.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번식하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그는 의지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우리 자신의 자연인 몸을 통해 직접 경험한다. 우리가 몸 안에서 느끼는 온갖 충동과 본능, 욕망, 정동 및 성 욕동 등은 바로 몸이라는 인간적 자연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적나라한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신체의 각 부분은 의지를 발현시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 욕동”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의지란 성을 매개로 특정한 개체 속에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개체화의 의지다.--- p.226

독일의 근대 철학자 중에서 사후에 쇼펜하우어만큼 광범위한 독자층과 명성을 얻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정신과 이성이 아니라 직관력, 창조력, 비합리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니체를 거쳐 생기론, 생철학, 실존철학, 인간학 등에 영향을 끼쳤다. 제자 율리우스 반젠과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무의식의 철학을 매개로 할 경우 쇼펜하우어는 현대 심리학과 프로이트, 융 및 그 학파와도 연결될 수 있다. 스위스 문화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철학 역시 쇼펜하우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키르케고르, 바그너, 톨스토이, 베케트, 아인슈타인, 하우프트만, 토마스 만, 카프카, 헤세 및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다. 괴테와 함께 문어체 독일어를 개혁한 사람이기도 한 그가 현대 독일 문학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은 20세기에도 계속되어 체호프, 버나드 쇼, 릴케, 엘리엇, 베케트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시대를 불문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읽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될 결심을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시작하였다.--- p.229

니체의 가장 중요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는 1883년 2월에 집필되었다. 마침 1부를 집필하는 중에 바그너가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체가 과거에 숭배하던 스승이 죽던 날 니체의 ‘위버멘쉬’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책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상의 몰이해를 조용히 견디며 『선과 악의 저편』을 썼으나 그것도 혹평을 받았다. 그것의 속편으로 쓴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 약자의 도덕이라고 비난한다. 『우상의 황혼』에서 소크라테스는 퇴폐의 전형으로서 부정되고, 이성과 도덕도 뒤집어진다. 기독교는 천민의 도덕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런데 『안티그리스도』에서는 역사적인 기독교를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예수라는 인간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p.237

니체의 철학은 자기극복에서 출발한다. 니체의 저서에 모순되는 말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처럼 이전의 자신을 부정하여 자꾸 자기극복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계속 다른 사람이 되어 갔지만 결국 조금씩 변한 동일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니체의 작품도 자기극복에 의해 세 번 변화를 겪는다. 『비극의 탄생』을 쓰던 낭만적 시기는 천재 숭배의 시기이다. 니체는 바그너에 열광한다. 그러나 『반시대적 고찰』을 쓰면서 천재를 부정하고 투쟁에 나선다.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는 잠언 형식의 지혜가 많이 들어 있다. 『아침놀』에서는 긍정의 싹이 보이고, 『즐거운 죽음』에서는 신의 죽음을 알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부터는 가장 창조적인 시기이다. 그리하여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등이 잇달아 나온다.--- p.242

니체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하이데거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고전적인 니체 해석자인 하이데거는 니체를 근대 서양의 형이상학적 담론의 완성자로 보았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은 니체를 탈근대주의의 기반을 놓은 현대 철학자로 재평가했다. 반형이상학적 니체 해석자인 카우프만은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니체를 해석한다. 또한 루카치, 메링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니체 해석자들은 니체를 파시즘과 국가 사회주의 대변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 외에 니체가 형이상학을 파괴하지만 극복과정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토마스 만, 아도르노, 카뮈, 야스퍼스, 하이데거, 뢰비트는 탈정치적,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니체를 해석한다. 그리고 탈근대적 니체 읽기의 대변자들인 푸코, 데리다, 들뢰즈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니체를 재평가하고 있다--- p.251

니체가 죽은 후 그의 이름이 히틀러나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주로 그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푀르스터와 결혼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그녀는 니체를 남편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과 편지들에 마구 손을 댔고, 개인적 탐욕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1901년 『힘에의 의지』 등을 출판했다. 인종주의자인 그녀가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정신이상인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는데, 게다가 그녀는 1930년대 초 히틀러에게 ‘니체의 위버멘쉬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p.252

토마스 만은 20세기의 위대한 고전작가이자 문명비판가이다. 그는 건전한 삶의 세계를 동경하는 시민적 기질과 미와 정신세계를 희구하는 예술가적 기질의 대립 갈등, 조화를 문학적 과제로 삼고 근 반생 동안 그것을 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시민문화 전체의 비극적 운명을 소설에서 축소하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비정치적 인물로 자처하던 그는 정치적 국면에 맞닥뜨리자 시대와 대결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많은 글과 강연, 방송을 통해 시대의 정치와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p.257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일기를 다 불태워야 할 텐데 일부는 남겨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사후에 자신의 은밀한 과거에 대해 알기를 원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만의 일기는 일반 독자들에게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다시 대중의 이목을 끌게 된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 그의 전기가 여러 권 나옴으로써 토마스 만은 신화적인 껍질을 벗고 속화되었으며 남다른 성적 취향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아셴바흐 같은 근엄한 고전작가의 모습이 사라지고 쉽게 상처받고 성적 이중성에 고통 받으며 희망 없는 짝사랑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그로써 그는 위엄과 장엄함은 잃었지만 대신 진실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인어 아가씨의 말 못할 고통을 지닌 그는 감같이 위장을 잘했기에 안데르센과 그의 동화처럼 미운 오리새끼가 되지 않고 평생 위엄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면의 죄의식과 수치감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p.261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많은 영향을 준 『이멘 호』는 슈토름(Theodor Storm, 1817-1888)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이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젊은 시절의 사랑 이야기가 목가적 분위기에서 전개된다. 1850년에 발표된 『이멘 호』는 슈토름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작가가 살아있을 때 이미 30판을 찍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노벨레이다. 젊은 날의 청춘과 사랑을 회상하는 고독한 늙은 남자의 이야기가 우수 어린 체념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서정적 이미지들 속에서 전개되며, 줄거리 또한 딸기 찾기, 홍방울새의 죽음, 수련꽃 등과 같은 상징적 장치에 의해 진행된다. 이야기는 회상을 통한 겉과 속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체념과 순응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p.289

『토니오 크뢰거』는 1900년 12월에서 1902년 11월 사이에 쓰인 작품이다. 1장과 2장은 토니오 크뢰거의 문학소년 시절로 그는 단순한 예술을 추구한다. 3장은 창작 수련기로 탐미적 예술을 추구하며 예술지상주의 경향을 보인다. 4장에서 9장까지는 기성작가 시절로 인간적 예술을 추구하며 감상이 아닌 인식을 중시한다. 그래도 탐미적 원칙은 유지하고 있다. 예술가와 시민의 갈등을 다룬 이 소설의 배후에는 동성애적 사랑이 숨어 있다. 토마스 만과 그의 소설에는 세계가 정신과 자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리가 놓일 수 없다. 소설에서 문학은 정신을 대변하고, 시민성은 자연과 삶을 의미한다.--- p.292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인어 아가씨」와 『토니오 크뢰거』는 동성애 코드로 서로 연결되고 있다. 한스 마이어는 안데르센 동화를 전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이었고 어머니는 까막눈의 세탁부였으며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안데르센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가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진다.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한 안데르센은 처음에 자전적인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하여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후 동화작가로 성공을 거둔다. 사회의 최하층에서 출발한 그는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완전히 적응하고 자기 삶의 양식화를 대중 소비용으로 완결한다. 비록 동화작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는 시와 소설, 기행문과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고 특히 극작가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나아가 그는 ‘아동문학가’로만 낙인찍히는 것을 싫어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의 동상을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동화들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성적 정체성이 불확실했다. 그의 내면에는 불안감과 자괴감, 그의 외면에는 출세욕과 허영심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이 공존했다. 또한 그가 여성들에게 쓴 구애편지는 그녀들이 다른 남성에게 깊이 쏠려 있을 때였다. 그것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은폐하기 위한 책략의 일환이었다. 안데르센은 성애와 우정을 확실히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 동안 여체에 대한 혐오와 젊은 남성에 대한 선호를 유지했다.--- p.301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저자 자신의 삶의 실제 사건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만은 콜레라가 발생한 1905년 베네치아 근처에 있는 섬에 머물렀고, 그 후 1911년 5월 베네치아를 여행했는데, 자신의 소설 속 캐릭터인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처럼 글쓰기의 어려움에 탈진하여 탈출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여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체험은 타치오의 모델이 된 열 살짜리 폴란드 소년을 만난 사실이다. 토마스 만의 부인 카트야 만은 회고록에서 ‘무척 매혹적이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년이 토마스 만의 마음에 들었으며, 남편은 언제나 그 아이가 해변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관찰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그를 실제로 사랑했다기보다는 그의 내면의 동성애적 동경이 그 소년에게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뫼스라는 이름의 그 소년은 1964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폴란드어 번역자에게 자신이 타치오의 모델임을 밝히고, 그때 찍은 가족사진 몇 장을 토마스 만의 딸 에리카 만에게 보냈다. 이 소설에 묘사되는 그 외의 다른 인물과 에피소드들도 『토니오 크뢰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토마스 만이 여행 중 실제로 체험한 것이었다.--- p.307

토마스 만의 미소년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관찰되고 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하노가 동급생 카이에게 품는 연정, 『토니오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한스에게 품는 감정,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아셴바흐가 미소년 타치오에게 휩쓸리는 현상, 『마의 산』에서 카스토르프가 초등학교 동급생 히페에게 품는 연정, 『파우스트 박사』에서 아드리안이 조카 네포무크에게 갖는 애정이 모두 그러한 성향을 띠고 있다. 크뢰거가 잉에에게 품는 이성애적인 감정은 오히려 한스에게 품는 감정보다 미약하며, 『마의 산』에서 카스토르프가 쇼샤에게 품는 사랑의 감정도 쇼샤의 모습에서 중성적인 면모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동성애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314]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았고 비디오로도 출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치오 역을 맡은 당시 열다섯 살이던 스웨덴 배우 비요른 안드레센의 조각 같은 아름다움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토마스 만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합작으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1971년에 제작한 이 영화에 개봉 당시 걸작이라는 찬사와 퇴폐적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 영화는 1971년 칸 영화제 25주년 기념상을 수상했고 에드워드 시대를 고증한 화려한 의상으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았으며 유럽에서 크게 흥행하기도 했다.--- p.320

『마의 산』은 20세기 최고의 고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토마스 만의 문제작이다. 『마의 산』은 흔히 시대소설, 교양소설, 철학소설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딱히 어느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마의 산』을 시대소설로 파악하여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자들은 토마스 만이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전전(戰前) 사회를 비판하고 특히 세템브리니를 통해 계몽주의를 주창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개체로서 자신의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3 때문이다. 『마의 산』을 교양소설로 보는 연구자들은 1950~60년대에 행해진 탈정치적인 형식 분석을 근거로 작품의 시도동기, 서술태도, 인용의 해석을 중시한다. 그리고 『마의 산』을 철학소설로 보는 사람들은 시대소설이나 교양소설과는 무관한 쇼펜하우어적인 철학소설로 보고 작품의 하강하는 구조를 강조하고 있다.--- p.328]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진보와 발전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닌 근대적 인간의 전형을 그려내고 있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에서 바로 이 근대적 인간의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원대한 목표와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근대인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괴테는 작품에서 노동착취와 살상, 폭력에 기초한 파우스트의 개발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파우스트의 간척사업은 가혹한 노동착취에 기초한 자본축적과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근대적 인간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개발과 발전이 능사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파우스트의 구원은 최고의 지식, 온갖 쾌락, 재화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근대인의 탐욕스런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파우스트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그레첸의 기도와 영원하고도 여성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p.354

우리는 ‘파우스트’ 하면 보통 괴테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독일에는 괴테 말고도 파우스트를 소재로 문학 작품을 쓰고 작곡을 한 많은 작가와 음악가 들이 있는데 토마스 만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무척 생소하고 읽기 까다로운 『파우스트 박사』는 그가 집필 도중 폐질환으로 수술까지 받으면서 가장 힘겹게 쓴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소설 주인공들 중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하노 부덴브로크, 『마의 산』의 한스 카스토르프와 더불어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을 가장 사랑했는데, 아드리안 레버퀸은 하노 부덴브로크, 토니오 크뢰거, 한스 카스토르프가 정신적으로 최고로 고양된 인물이다. 특히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이름에는 토니오 크뢰거처럼 이탈리아와 북독일의 이름과 성이 섞여 있어 그 인물의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p.357

1947년 『파우스트 박사』가 발간된 후 1948년 2월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아드리안 레버퀸의 12음기법에 그 음악체계를 마련한 원래 창조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마스 만에게 거세게 항의하면서 2년간 여러 차례에 걸친 논쟁이 벌어진다. 사실 쇤베르크는 그 책을 알지도 읽어 보지도 못했는데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전 부인이 중간에서 이야기를 잘못 전달한 때문이었다. 그녀는 토마스 만이 책에서 쇤베르크를 매독환자라고 했다면서 그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척 좋았던 두 사람의 사이는 금이 가게 되었고 쇤베르크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거세게 항의까지 했다. 토마스 만은 그런 항의가 부당한 것 같았지만 첨예하게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그다음 판부터는 소설의 끝에 이 작품이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자신의 초상과 마찬가지라고 착각한 주인공 레버퀸이 매독에 걸려 정신병자로 죽는 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하며, ‘동시대의 어느 작곡가이자 이론가’라는 표현 때문에 흥분했다. 그래서 1949년 1월 1일에 나온 [토요 문학 리뷰]라는 잡지에서 토마스 만은 이 소설은 ‘니체 소설’이며 거기에 자신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다고 밝혔다.--- p.370

토마스 만은 『파우스트 박사』를 집필하던 중에 「독일과 독일인」이라는 연설문을 작성했다. 1945년 2월과 3월에 작성한 그 글에서 그는 ‘독일인으로 태어나면 독일의 운명과 죄과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 죄과에서 사면시키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자신을 선한 독일의 대표자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강연에서 그는 왜 독일의 운명을 의인화하는 인물이 음악가여야 하는지에 대해 ‘음악은 악마적인 영역이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음악을 독일적인 것의 심리적인 등가물로 보았다. 그는 그 강연에서 ‘악한 독일과 선한 독일이라는 두 개의 독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독일이 존재하는데, 그 최선의 것이 악마의 술책으로 말미암아 악한 것으로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즉 선한 독일과 악한 독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일이 최고 선한 것을 악마의 계략으로 빼앗기는 바람에 악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p.378

『수레바퀴 밑에』는 헤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한스 기벤라트의 고향 마을은 헤세의 고향 칼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헤세는 이 작품을 쓰면서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보낸 자신의 체험을 가공하고 있다. 학생들이 기거하는 방의 이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다.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 기벤라트도 헤세와 마찬가지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 우등생이자 모범생이었다가 일순간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게 된 이유는 헤세와 기벤라트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갈등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헤세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골수 경건주의자였다. 그는 모든 것을 독실한 신앙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헤세는 아버지에 대한 종교적 반감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신학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교회를 외면했다. 종교적으로 아무런 결점도 없는 아버지는 헤세에게는 언제나 한결같은 동상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p.392

『데미안』은 이처럼 헤세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쓰인 소설이다. 헤세는 1917년 가을에 출판업자인 피셔에게 편지를 보내 에밀 싱클레어라는 청년의 원고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중병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고 있으니 그 작품의 출판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발표된 작품은 1919년에 출판되자마자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 버금가는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데미안』이 신인작가에게 주는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 상의 수상작으로 정해지자, 헤세는 그것이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고 수상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20년 4판 때부터는 『데미안』이 헤세의 본명으로 출판되었다. 초기에는 우수에 찬 낭만적이거나 유미적인 작품을 썼던 헤세가 자기 내면의 기록인 『데미안』의 저자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작품의 주인공 이름은 정신병에 걸린 친구 횔덜린을 곁에서 돌본 이삭 폰 싱클레어(Issac von Sinclair)에서 따온 것이다.--- p.397

『데미안』에는 무의식과 마주하는 싱클레어의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13년과 1914년에 문헌을 통해 정신분석에 대해 알게 된 헤세는 1916년 5월부터 1917년 11월까지 융(Jung)의 제자인 랑(Lang) 박사로부터 60여 회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다. 1921년에 헤세는 영지주의자에게 많은 흥미를 느낀 융한테서도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다. 융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가 무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여 의식의 세계와 통합된 개체가 되어야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데미안이 들려주는 카인의 이야기는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담고 있다. 융의 심리학은 헤세로 하여금 인습적인 종교관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데미안』에는 여덟 개의 꿈이 등장하는데 일곱 개는 싱클레어의 꿈이고 여덟 번째 꿈은 데미안이 꾼 것이다.--- p.406

헤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싱클레어와 비슷하다. 둘 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누이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와 마찬가지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성격이어서 부모는 여섯 살 난 그를 감화원에 보내려고 했을 정도였다. 김나지움 시절도 둘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 헤세도 싱클레어처럼 그 시절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헤세는 특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자살을 하겠다고 부모를 위협하기도 했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도 융의 제자인 랑 박사와의 정신분석 치료와 연관시킬 수 있다. 내쫓긴 상태에 있거나 홀로 있다는 경험을 한 것도 싱클레어와 헤세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p.411

『싯다르타』는 1919년 12월에서 1922년 5월 사이에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집필되었다. 헤세는 1920년 2월에 『싯다르타』 집필에 본격적으로 착수해서 6개월 만에 제4장까지 순조롭게 써내려갔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자 헤세는 우선 제4장까지를 「금욕자들 곁에서」라는 제목으로 1920년 8월에 [노이에 취리혀 차이퉁Neue Zuicher Zeitung]에 발표했다. 9월에는 그것을 쿠르트 볼프의 잡지 [수호신Genius]에 「싯다르타의 세속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다음 해에는 문예지 [노이에 룬트샤우Neue Rundschau]에 제1부로 묶어 발표했다. 이처럼 제2부가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은 것은 헤세가 그 내용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싯다르타의 금욕 생활을 기술할 때는 그럭저럭 쉬웠는데 그를 긍정자이자 극복자로 기술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독일 각지에서 헤세를 비방하는 편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쇄도해서 창작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세는 1922년 4월에 다시 『싯다르타』 집필에 착수해서 5월 7일에 마무리를 짓고 5월 28일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게 된다. 『싯다르타』의 제1부는 같이 반전 활동을 한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에게 헌정되었고, 제2부는 외사촌 빌헬름 군더르트에게 헌정되었다.--- p.416

카프카는 청년 시절 자신을 사회주의자 내지는 무신론자라고 선언하고 기성사회에 대해 명백한 적대감을 표명했다. 성인이 되자 제한적이긴 하지만 줄곧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체코 무정부주의자 회합에 참석했다가 붙잡혀 거액의 벌금을 물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사회주의화된 시온주의에 뚜렷한 관심과 공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카프카는 강연이나 야회(夜會)에 참여하여 수학자 코발레프스키,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양자론이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정신분석의 기초 보고를 들었으며, 칸트와 헤겔의 저작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방관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유대인이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현대 지식인이기에 유대의 유산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체코의 정치적·문화적 열망에 공감했지만 독일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기에 그러한 공감은 억눌린 채 잘 드러나지 않았다.--- p.432

카프카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그가 법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부했을 뿐 법관이나 변호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피해 “방 안으로, 책 속으로, 좀 정신 나간 친구들한테로, 터무니없는 이념들 쪽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자신감을 잃고 한없는 죄의식만 느낀다.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널 생선처럼 토막 내 버릴 테다”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 카프카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아버지 앞에서 설설 기었다. 『변신』에서도 아버지와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대개 폭군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은 사장, 관료, 법 등의 층위와 겹쳐진다. 아버지는 그레고르의 방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그를 방안으로 몰아넣을 때는 ‘두 발로 쾅쾅 구르며’ 위협한다.--- p.441

우리나라 소설에서도 변신의 모티프가 김영현의 단편 「벌레」와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에서 수용되고 있다. 김영현의 단편 「벌레」는 감방에서 교도관의 가혹 행위 때문에 자신이 한 마리 벌레로 변한 것 같은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품에서 ‘나’는 스스로가 벌레처럼 느껴져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증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벌레」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난해하지 않고 독재 권력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풍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김영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는다. 그러나 ‘나’가 벌레로 변하게 되는 것은 폭력적 권력 때문만이 아니고 심층에서 일어나는 내적 심리도 작용하고 있다. 가족과 애인이 ‘입에서 침을 흘리고 옷에 오줌을 싸놓은’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보면 놀라서 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벌레』의 ‘나’에게는 변신이 치욕이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렇지만 ‘나’는 ‘벌레’가 되어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에서 ‘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변신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 ‘나’는 땅끝 ‘토말’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땅끝까지 갔다는 건 ‘나’와 ‘그녀’가 현실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이 재일 한국인 2세이며 자신에겐 영토가 없다고 말한다. ‘나’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변신하게 되는 건 카프카처럼 자신도 뚜렷한 영토를 갖지 못한 소외된 사람임을 암시한다.--- p.445

흔히 카프카의 『소송』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성』은 괴테의 『파우스트』, 『아메리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비견되기도 한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의 카스토르프처럼 사로잡힌 몸이 되어 소송이라는 심연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카프카의 문학은 지금까지 알려진 문학 작품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한 형식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 기법은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카프카의 모든 문장은 ‘해석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작가는 독자의 사유를 촉발하는 핵심적 과제를 성취하고 있다. 즉 카프카 문학의 특수성은 종래의 사실주의 문학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언어를 충격적으로 혁신한 미적 현대성에 기인한다.--- p.448

카프카는 1914년 7월 12일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뒤 다음 달 중순에 『소송』을 쓰기 시작해 1915년 1월에 미완성인 채로 끝낸다. 소설에서 감시인의 이름이 빌렘과 프란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에서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이 암시되고 있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요절한 다음 해인 1925년 이 미완성 소설에 『소송』이란 제목을 붙여 출판하였다. 막스 브로트는 불태워 없애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출판하게 된 이유를 이 소설이 ‘단연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 소설의 생성 배경으로 1914년 5월 베를린에서 있었던 펠리체 바우어와의 약혼과 곧 이은 7월의 파혼으로 인한 카프카 생애의 위기를 들 수 있다. 그는 파혼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꼈지만, 결혼과 가족을 꾸리는 문제에서 실패했다는 죄책감이 더욱 컸다. 이 같은 죄책감에 쫓기면서 카프카는 자기고발과 자기심판이라는 내적 소송을 경험하게 된다. 이 소설이 카프카의 자전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주인공 K가 바로 카프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는 친필 원고에서 뷔르스트너 양을 약어, F.B.로 적고 있는데, F.B.는 펠리체 바우어의 약어로 보인다.--- p.451

프란츠 카프카라는 거대한 문학 현상을 다룬 비평사의 끝없는 논의와 열기는 1959년대의 ‘카프카 유행’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1950년대의 카프카 유행은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이 주는 매력은 당시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또한 카프카 연구의 침체를 예견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그의 신비한 언어 세계에 대한 연구 문헌이‘5천여 권’의 방대한 양에 달하고 있지만 그 논지들이 완전한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이다. ‘카프카, 그는 끝이 없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제기되는 한 카프카 문학에 대한 미련과 사랑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련과 사랑에 관계없이 카프카 문학에 대한 연구가 항상 벽에 부딪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카프카의 언어 구조와 표현 세계가 지니는 미로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카프카 문학의 언어와 표현이 미로이듯이, 카프카 문학의 수용사와 비평사 또한 미로의 역사이다. 카프카에게는 미로가 곧 그의 미학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카프카 문학의 본령을 찾는 것은 피라미드의 전설을 찾는 것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p.474

카프카는 『성』에서 개인의 삶 자체가 정치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작품이 역사와 세계에서 고립된 개인의 실존적 고통, 즉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이거나 혹은 반정치적인 삶을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성』에서는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천착이 더욱 강력하다. 성은 권력의 중심에 있으며 성 아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성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마을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에서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벌써 K는 마을 농부들의 모습에서 무기력과 고통의 기색을 발견한다. 그런데 K도 무의식적으로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은밀한 비밀처럼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p.487]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학도지원병 파울 보이머와 그의 동료 전우들의 삶과 죽음을 그린 전쟁소설이다. 이 작품은 진실한 기록문학이라고 격찬을 받는가 하면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대의 증오감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배척당하기도 했다. 이 소설 자체는 전쟁을 정면으로 고발한 것은 아니지만 열아홉 살의 병사 보이머와 그의 전우들은 죽음과 삶의 문제를 거친 속어로 서로 이야기하며 전쟁의 참상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단순한 항의를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에 반전 의식과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작가는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이 작품은 1930년 독일의 파프스트와 미국의 루이스 마일스턴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p.496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자신이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의 체험을 1920년경부터 나치가 출현할 때까지 약 10년간 독일 문단을 지배했던 문예사조인 신즉물주의적인 수법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이 문예사조는 자아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기법이다. 또한 신즉물주의는 표현주의를 거친 리얼리즘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 물질문명의 범람 등이 이 문예사조가 생겨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추크마이어, 브레히트, 케스트너, 데프린, 노이만 등이 이 사조의 대표 작가인데, 레마르크의 경우 이 유파에 넣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주장이 더 우세하다.--- p.503

독일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이 사망한 지 어느덧 30년이 지났다. 1985년 7월 16일에 뵐이 사망하자, 독일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는 “작품에서 오직 자신의 시대를 묘사하려 했고, 이로써 모든 시대를 위해 글을 쓴 작가 하인리히 뵐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3라고 평가했다. 뵐은 많은 작품들에서 나치, 전쟁, 사회 정치적 테마를 다루면서 가톨릭교회와 독일 시민의 속물근성을 비판했고, 독일의 과거 반성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전후 독일 문학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런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지금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언은 상당히 무색해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존경하는 위대한 존재였던 뵐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그는 이제 독일어 수업에만 가끔 등장할 뿐이다. 그의 작품은 그 뜻은 좋지만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p.510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Das Parfum』는 수많은 고전의 구절을 모방하거나 패러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고전에 능통한 독자라면 쏠쏠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정체성의 상실을 뜻하는 냄새 없는 인간이라는 모티프는 샤밋소의 그림자 없는 주인공인 『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나 호프만스탈의 『그림자 없는 여인』을 상기시킨다. 이 소설은 출생 상황이나 출생 전의 의식, 외형 등에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도 통하고, 테리에 신부의 신학 연구, 그르누이의 동굴 잠, 순결한 소녀 등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상기시킨다. 또한 범죄자가 된 천재의 이야기란 점에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도 연결되며, 예술가를 왕이자 범죄자, 사기꾼으로 보는 『토니오 크뢰거』, 『대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암석 위에서 이슬과 이끼만 먹고 살아남는 『선택받은 남자』, 7년간 산중 생활을 하는 주인공을 그린 『마의 산』, 니체의 예술가 비판과 디오니소스 신화, 편집증적인 목표 추구라는 점에서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 식인 모티프로 『펜테질레아』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은신처를 찾아 산속으로 도피한다는 점에서 헤세의 에세이와 주인공들도 상기시킨다.--- p.534

『향수』는 발전 성장의 주체가 일종의 예술가이므로 예술가소설로 볼 수 있다. 또 주인공의 성장 목표가 예술가이고 또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방랑과정을 묘사하므로 예술가적 교양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역시 예술가적 교양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이 감각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라면 향수는 시각이나 청각이 아닌 후각과 연결되는 예술이다. 그르누이는 ‘개구리’라는 뜻이다. 개구리라는 단어는 18세기 파리의 멍청한 사람들, 저주 받은 왕자, 냉혈동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뭍과 물에서 살 수 있는 개구리는 예술가로서의 작품 주인공이 갖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그르누이의 향수 추구는 예술적인 미적 원칙에의 추구로 해석할 수 있다.--- p.543

『향수』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와 여러 도시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교역과 장사로 부를 획득한 리쉬는 딸마저 사업수단으로 삼는 이해타산적인 부르주아이다. 리쉬는 모자이크 그림이라는 시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범인의 최종 목표가 자기 딸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모든 희생자가 보다 높은 원리의 일부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각이 시간과 관련된 감각이라면 이성적인 감각으로 평가되는 시각은 공간과 관련된 감각이다. 시각에서 회화가 등장했다면 그동안 후각은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시각을 사용하는 리쉬가 후각을 사용하는 그르누이에게 패배함으로써 후각은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p.546

한트케는 모든 존재 현상에 대해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것을 창작의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문학의 정치화, 참여문학을 거부하는 것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도발적 저술 작업, 영화제작 참여 또는 심지어 정치적 활동 모두를 가장 적절히 설명해주는 말은 ‘선입견에 대한 도전’이라 말할 수 있다. 한트케가 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끔찍한 현실이 아니라 사실 이상적인 것, 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결합하고 포용하며 화해시키는 것이며,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어린 시절, 이상적인 세계,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구 유고슬라비아를 배경으로 하는 한트케의 글이 비현실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그곳이 그의 회상의 공간, 시적 공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회 개혁의 수단이 아니라 자아의 탐구, 정체성 찾기로 보는 한트케는 문학을 통해 외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뒤에 숨겨진 것, 현실 너머의 것을 서술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모색과 변신을 거듭해 온 한트케는 다시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제 점점 구도자, 예언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p.561

『어느 작가의 오후』에서도 그는 카프카를 연상시키는, 현실과 망상이 교차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선보인다. 작품의 주인공인 작가는 ‘집 안의 집’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작업실에서 글을 쓴다. 그는 집 전체가 위험 속에 방치된 듯한 느낌을 받고, 현관의 식물들은 자기들을 좀 봐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낀다. 심지어 집까지 그에게 잠자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낀다. 부근의 작은 산의 밤 비행기를 위한 신호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경고 신호를 감지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집에서 차분히 앉아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그의 가장 사랑스러운 시간이다. 그런데 그는 공간 안의 여러 사물들에 낯설고 서먹한 기분을 느낀다. 그 공간은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갇혀 있는 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자신의 방 안에서만 돌아다니고, 거실로 과감하게 나왔다가 아버지에게 쫓겨 돌아가는 것과는 달리 작가는 집 안의 곳곳을 돌아다니고, 외부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p.565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은 시간적으로는 1968년의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이며 공간적으로는 프라하와 주변 온천장, 시골 집단 농장, 그리고 토마스와 테레사가 망명생활을 하던 취리히와 프란츠가 살고 있는 제네바이다. 주된 내용은 체코 공산주의의 민주화 과정이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난 후 주인공들이 존재의 위기감에 휩싸인 채 섹스와 사랑(즉 육체와 영혼)의 갈등 속에 살아가는 모습이다. 소설은 작가의 철학적 고찰로 시작된다. 즉 니체의 ‘영원한 회귀’의 역설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논한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논구가 그것이다. 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라는 배경 앞에서 우리의 삶은 역설적으로 아주 가벼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침공이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앞에서 주인공들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행동하듯이 말이다.--- p.574

독일의 철저하고 집요한 과거 반성은 우리의 부러움을 사게 한다. 최근 독일 언론은 ‘전직 나치 친위대 소속 경비원 오스카 그로닝이 이듬해 봄 재판을 받게 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무려 아흔셋의 나이에 단죄될 위기에 놓인 그로닝은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원 혹은 회계사로도 통했던 인물이다. 독일 하노버 검찰이 공개한 그의 혐의는 지난 1944년 5월 16일부터 7월까지 단 두 달 동안의 행적이다. 그는 당시 아우슈비츠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이곳으로 끌려온 유대인의 학살을 방조한 것과 이들의 돈과 물품 등을 가로챈 후 장부를 작성해 나치 정권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그로닝은 ‘친위대 상관이 아우슈비츠로 가라고 명령해서 간 것뿐’이라면서 ‘유대인을 죽이는 잔학한 행위를 목격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p.593

법대 교수와 판사를 역임한 슐링크는 인종학살의 트라우마 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복잡한 윤리적 의문들과 맞붙는다. 그러나 슐링크는 그 희생자들보다는 나치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들에게로 초점을 옮긴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자들에게 전후 세대들이 어디까지 부모 세대의 죄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러한 끔찍한 과거가 과연 해소될 수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나치를 악마처럼 묘사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과 우리 사이를 거짓 구별하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인가? 우리의 일상에도 악마가 스며 있어 우리를 따라다니며 옥죄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 p.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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