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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김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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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한 동료 소방관의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는 소방관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내 눈시울도 어느 사이 젖는다. 그래 슬픔을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런데 말이다.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새로 들어오는 슬픔이 묵은 슬픔을 밀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 p.49 참으로 초연한 표정으로 K시인이 먼저 대답을 했다. “그 말이 맞긴 한데요. 사실 농번기라고 할 것도 따로 없어요.” 그러자 S시인이 바로 말을 받았다. “맞아요. 시인들은 일 년 열두 달이 내내 보릿고개예요.” 두 시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을 들은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 p.115 그들의 키는 2미터에서 140센티미터까지, 몸무게는 150킬로그램에서 35킬로그램까지 분포되어, 차이의 외연이 놀랍도록 확장된다. 외모 또한 어떤 중딩은 30대 성인의 외모를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중딩은 초등학생 정도의 외모를 가진다. 지적 능력 역시 특정한 준거로는 짚어내지 못할 만큼 개별적 특성을 지닌다. 중딩들은 그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기꺼이 권력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이를 물리적으로 행사한다. --- p.198 연료비 할인이나 버스전용차로 주행 허용 등이 그런 것들이다. 나처럼 밖에서 늦게까지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택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그런데 사실 지하철이나 버스요금에 견주면서 택시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터기에서 요금이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바짝바짝 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택시를 마음 편하게 타는 나만의 심리 전술을 고안했다. --- p.218 언젠가부터 호의와 찬탄 일색인 김수영에 대한 평가의 대세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번은 어떤 술자리에서 김수영에 대해서 내가 비판조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하나같이 눈총을 받은 적이 있었다. --- p.222 28홉의 피의 전위가 흐르고 있는 입술, 우린 입술을 통해 서로의 피와 닿는다. 우리는 입술을 통해 서로의 피의 흐름을 감지한다. 키스는 피와 피가 서로의 향기와 온도를 알아보는 인사법이다. --- p.229 |
작가의 말:
1. 나는 어릴 때부터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나를 다른 사람과 견주는 것도 싫어했고 나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기고 앞서 가라면서 줄을 세우는 제도권 교육이 정말 싫었고 당연히 줄을 서지도 않았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는 나의 이 같은 풍속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내가 참여하는 일에서 1등, 베스트원이 되는 걸 한 번도 원했던 적이 없다. 나는 동료 작가나 시인의 작품보다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다만 내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집중했다. 내 목소리와 색깔을 어떻게 낼 것인가, 이것만이 내 관심사였다. 그러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의 서열을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이익을 분배하고, 그 이익 앞에서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예술계도 문학판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좌도 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로서 나는, 이 제도화된 생태계의 폭력적인 구조, 미친 시스템을 묘사하는 데 내 문학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욕망, 위선, 위계, 지배, 해방.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탐구 대상인 것이다. 평소의 내가 현실정치나 현안에 대해 비교적 거리를 두는 것은,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내가 아니어도 나보다 그런 일을 잘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2. 이 책에 모인 글들은 한국일보에 2012년 겨울부터 2014년 가을까지 2년 가까이 연재했던 것들이다. 소설가로서 내 눈에 들어오는 세계의 다양한 형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심상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내 사유와 감각의 첨단을 찾아 표현하려는 열정의 소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형식과 내용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에피소드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흐릿한 관념이나 몽상적 에피그램의 형태를 띨 때도 있으며, 때로는 견고한 주장이나 선언의 목소리를 가지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포괄적인 의미에서 ‘변명apologia’이라고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실존적 변명 말이다. 그런데 이 변명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추궁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인 당신의 추궁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더 적극적으로 변명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세계가 당신의 추궁과 나의 변명으로 가득 차기를. 그 문답의 행간에서 이 세계가 비로소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3. 간밤부터 비가 내린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는 다행히 빗소리가 잘 들린다. 비가 제법 오면 물 흐르는 소리, 그러니까 빗물이 돌계단을 흘러내리는 소리까지 들린다. 왜 빗소리 얘길 하냐면, 요즘 나에게 큰 위안이 바로 빗소리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씻김을 받는 기분이랄까. 깊이 스미기 위해 빗물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나는 좀 더 나의 내부로, 내 고유한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세상에 고개를 함부로 내밀었다가, 보지 않아도 좋을 것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세계의 창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부터 말이다. 4.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 싶다. 어수선한 원고를 귀한 책에 담아주신 gasse 김남지 대표님과 미지의 독자께, 그리고 내 삶의 허기와 욕망을 송두리째 돌아볼 수 있는 절대적인 적막을 허락해준 K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15년 봄, 새절에서 김도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