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원명원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명원의 파괴를 보면서 서양 문명의 패권과 폭력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다원화된 서양 사회에는 이처럼 도덕적 분노를 터뜨리는 양심적인 지식인이 적지 않았지요.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To the Person Sitting in Darkness)’라는 글에서 8개국 연합군의 살상과 약탈을 성토하며, 문명을 자랑하던 서양인들의 야만스런 강도짓을 비판했습니다. 프랑스의 위고와 미국의 트웨인은 제국주의의 약탈을 ‘강도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만일 8국 연합군이 두 번에 걸쳐 파괴하지 않았다면 원명원이 이처럼 폐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pp.11-12
영국군 총사령관 엘긴은 함풍제가 원명원을 아주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불을 질러야 중국 황제를 마음 아프게 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즉 불을 질러 파괴하기 이전에 이미 원명원 내의 좋은 물건은 하나같이 갈취했으니, 그 현장을 방화하여 스스로 저지른 약탈의 흔적을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었던 범죄 은닉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 p.15
명·청 원림이 전통적인 원림 예술을 종합했다고 말한다면, 원명원은 명·청 원림의 성과를 종합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원명원을 건립한 시대에는 중국 원림 예술이 일찌감치 성숙되어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전성기로서, 풍요로운 재화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은 양식으로나 외관으로나 모두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왕실 궁원을 창조해 내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원명원은 평탄한 대지 위에 쌓아올린, 이궁과 별원,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풍광,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 솜씨 좋게 만들어진 산과 바위, 사원, 서원, 도서관 등 갖가지 기능을 가진 다양한 건축군의 종합체다.
--- p.64
장춘원에 세워진 유럽풍 궁전과 원림인 ‘서양루(西洋樓)’는 간단히 중국의 베르사유 궁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장춘원 북단에 걸쳐 있는데, 건륭제가 건축한 가장 독특한 원림이다. 건륭제 이전에도 중국은 오랜 동안 다른 나라의 건축 양식을 채용했다. 당나라 때에는 중앙아시아 양식을 받아들였고, 몽골이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한 뒤 원나라 대도(지금의 베이징)에는 이미 기독교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 광둥 지역에 외국과의 무역이 개시되자 서양식 상업 건축물과 일반 주택이 지어졌으며 16세기 이래 마카오에는 포르투갈식 건축이 지어졌다. 그렇지만 제왕 궁원 안에 대규모 유럽식 건축을 수용한 통치자는 건륭제가 처음이었다.
--- pp.128-129
건륭제는 원명원 안 곳곳에서 식사하기를 즐겨했다. 이는 원내 주요 지점마다 어용 주방과 요리사들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보통 구주청안의 침궁에서 저녁 식사를 먹었고 또 동락원 식당에서도 식사를 들었다. 대부분 그 주위에 커다란 희대(공연 무대)가 있어서 식사 후 여흥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 송대 이후 중국 엘리트들은 저녁 식사 후 여흥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습속이 되었다.
--- p.249
원명원 내 충복들은 그의 용안에 미소를 띠우고 환심을 사고자 12명의 아리따운 만주족 소녀들을 원내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 엽혁나랍이란 성씨를 지닌 소녀가 함풍제의 마음을 잡아끌었고 결국 악명이 자자한 권력자였던 자희 태후(서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청나라를 40년간 지배했다. 이들 사이의 원명원 로맨스는 무수하게 허구적 서사로 쓰였다.
--- p.263
자희 태후는 경극에도 상당히 열의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권력을 잡은 뒤, 원명원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의원을 이화원으로 재건축하고, 잊지 않고 수많은 희대를 세웠다. 오늘날 유람객들은 이화원에서 그 당시 지어진 거대한 희원(戱院)을 볼 수 있다.
--- pp.264-265
1997년, 홍콩 부근의 도시 주하이는 서양루, 구주청안, 방호승경을 모방하여 ‘원명신원(圓明新園)’을 지었다. 물론 상업주의가 이 조성 배후의 원동력이었다. 이 원명신원의 첫해 수입은 뜻밖에도 1.6억 위안이 넘었다. 이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는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제왕 궁원을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불가능한가?”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역사가나 건축가 할 것 없이 모두 현대화 속에서 어떻게 원래의 건축 유적을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에게 복원은 문화 유적에 대한 파괴의 연속이며, 유적 보호는 오히려 애국과 미학의 목적에 부합할 뿐이다. 아쉽게도 이미 경종이 울렸다. 전통 건축과 원림 공예의 최고 수준의 기술은 이미 알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자금이 충분하면 언제라도 잃어버린 궁원을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잃어버린 기예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
--- pp.376-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