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재미를 겸비한 성장 만화
- 김희조 (rarity@yes24.com)
2006-02-09
이 만화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나온다. 현명한 인간과 솔직한 인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규율과 도덕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간과 그런 건 엿이나 먹으라고 생각하는 인간 말이다. 좀더 짧게 이야기하자면 어른(으로 늙는 사람)과 아이(의 마음으로 크는 사람).
해럴드 사쿠이시의 ‘벡’은 중학생 소년의 성장 스토리다. 지나치게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내던 평범한 소년 유키오에게 사실은 엄청난 음악적 재능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이제 꿈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 많이 보아왔던 것 아니냐고? 그렇다. 고전이 된 ‘슬램덩크’,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오디션’이 있고 김수용의 ‘힙합’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다르다. 강백호에게는 공정한 룰이 존재하는 경기장이 있었다. 그에게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그러기 위해 먼저 자신을 넘어서야 했고) ‘오디션’과 ‘힙합’에도 상대의 실체는 비교적 분명했다. ‘벡’의 유키오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경쟁 밴드가 아니라 편견 가득한 사회다. 밴드 벡의 멤버로 보컬과 기타 연마에 열중하고 있는 유키오에게 진학담당 교사가 말한다. “당장 때려쳐. 가수가 무슨 옆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아냐? 내 교사 생활 20년 동안 가수가 된 졸업생은 한 명도 없어.”
읽는 동안 좀더 절실한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듯 책을 덮은 후에도 유키오의 기타와 보컬이 귓전을 웅웅거리며 나의 현실에 개입하려 한다. “난 어느새 무난하게 지내기 위해 억지로 남들에게 나 자신을 맞추는 인간이 된 걸까?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정상이 아닌 건 오히려 나”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천재적인 기타 실력, 아름다운 목소리, 놀라운 점프력, 컴퓨터 슈팅 감각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한두번 쯤은 찾아온다. 남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르고 지나치겠지만.
이 만화에는 두 부류의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있었던 뮤지션들의 이야기와 작가의 상상력이 지어낸 스토리가 얽혀 있다. 벡의 리더이자 천재 기타리스트인 류스케가 연주하는 기타는 바디에 여러 개의 탄흔을 지녔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을 지녔다. 이 기타는 원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소니보이 워터스의 것인데 어느 클럽에서 루실이란 이름의 여자를 놓고 어떤 남자와 다툼을 벌였다. 화가 난 이 남자가 라이브 중인 소니보이를 총으로 쏴죽였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그 기타는 루실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 때 맞은 총탄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B. B. 킹과 그의 기타 루실(Lucille)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살벌하게 각색한 것이다. 원본은 다음과 같다. 비비킹이 24세 때 바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남자가 싸움을 하다가 석유램프를 걷어차서 생긴 불 때문에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사람들과 함께 간신히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두고 온 기타가 뒤늦게 생각난 그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기타를 가지고 다시 나오자마자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싸움의 원인이 루실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기타를 루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벡이 전통의 라이브 하우스 마키에서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하는 과정도 그렇다. 드림 시어터, 게리 무어, 존 메이욜 등의 라이브 앨범이 녹음된 곳으로 유명한 마키는 런던의 라이브 하우스로, 핑크 플로이드도 마키에 고정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넓혀나간 유서깊은 곳이다. 그밖에 8, 90년대 미국 랩퍼들의 살벌한 분위기를 재현한 것이나, 아르바이트와 밴드 사이를 힘겹게 오가는 인디 밴드들의 삶이 생생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막간을 채우는 삽화도 만만치 않다. 너바나의 「Nevermind」를 비롯 레드 제플린, 펄잼, 에어로스미스, 오아시스 등을 유머 넘치게 패러디했다.
힘과 재미를 겸비한 만화 ‘벡’. 꼭 록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현실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본작에 ‘슬램덩크’ 못지않은 소년 만화 특유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Beci is… 천재 기타리스트 류스케, 훵키 그루브 베이시스트 타이라, 래퍼 치바, 유키오의 친구인 드러머 유우지, 그리고 주인공 유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