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띌 정도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결 좋게 뒤로 넘겨졌다. 칠흑처럼 어두운 색은 눈동자에게까지 흐른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사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차가운 입김이 시리게 공중에 피어올랐다.
“병신 새끼.”
피로 얼룩진 손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탁한 검은 눈동자에 비치는 남자는 뒤집어진 눈으로 고통을 호소해 왔지만, 사내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는 떠나갈 줄 몰랐다.
“그러니까 따라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그 웃음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조금 화질이 좋지 못한 화면 뒤에 존재했다.
자신의 기억 속 그 사내는 ‘악역’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막 촬영이 끝난 장소는 부산스러운 만큼 빠르게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연. 25살. 185cm에 70kg. 시원하게 뻗어 있는 몸매에 깔끔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외모. 블루레인 소속으로서 배우가 된 지는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당히 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간 그 사내는 조금 피곤한 듯 차에 올라탔다.
“수고했어.”
아까 전까지 자신이 쉴 새 없이 내뱉었던 말이 매니저에게서 다시 돌아오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직 쌀쌀한 날씨, 미리 히터를 틀어 놓은 자동차 안은 따뜻했기에 조금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어땠어? 김우연은?”
부드럽게 방송사 주차장을 나서면서도 모든 관심은 그쪽에 있는 듯이 이연의 매니저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럼에도 대답은 그리 쉽게 돌아오지 않고, 어색하게 뒷목을 매만진 이연이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 역시나라는 듯, 그의 매니저인 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잘생긴 등신은 이번에도 말을 못 꺼냈구나.
금세 빨간불에 걸려 멈춰선 핸들에 턱을 괴고 앞차를 바라보았다.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조용해진 공간은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등신이다 저놈은.
이연보다 3살이나 많은 그는 매니저 경력으로는 베테랑이라, 그보다 이 바닥에 오래 몸을 집어넣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김우연’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꽤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김우연이라는 사내는 현재 톱 중에서도 톱이라는 악역 배우였다. 살인마, 조폭, 살인청부업자, 마약상인 등. 누가 보더라도 더러운 악당이라는 배역이란 배역은 전부 그의 이름이 따라붙을 정도로, 병적으로 악역에만 집착하는 배우.
살짝 창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새까만 머리카락, 매서운 눈빛과 냉랭한 표정이 같은 악역이라도 맡은 역에 따라 달라지는 마법을 보인다. 하지만 그건 배역 안에서의 김우연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악역’이라는 수식이 붙을 만큼 매력적인 그 배우는 원래 성격 자체도 차가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말 한번 못 걸어 봤냐.”
“대본에 있는 것 정도는…….”
“그게 대화냐, 연기지.”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하자 다시 부드럽게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팬들의 말로는 자연스러운 매너, 말없는 상냥함이라던데. 건우의 눈으로 보는 이연은 그냥 빠돌이였다. 심각한 김우연 빠돌이.
“이 녀석, 관리 좀 잘해야 할 거다.”
처음 사장님에게서 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웬 농담인가 싶었었는데,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겉만 보자면 이연이라는 남자는 여자 한둘은 쉽게 울릴 만한 외모로, 깔끔한 모습의 그는 그야말로 신사라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이 깨지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그의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생각보다 활발한 녀석임은 알게 됐지만, 역시 ‘빠돌이’라는 단어가 납득될 정도의 행동은 보지 못했었는데.
“왜 밥상을 차려 줘도 퍼먹지를 못 하냐! 이번이 3번째다. 3번째야. 거기다 이번에는 예능까지 같이 출연해 놓고서는!”
처음 그것을 실감하게 된 것은 우연히 한 방송국에서 김우연을 마주치게 됐을 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 상대방에 비해 딱딱하게 굳어서는 말 한마디 못 하는 모습에 등신 확정. 두 번째로 만났을 때에는 인사 겸 고개를 숙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에 확실히 등신 확정이었다. 도대체 그는 어디의 소녀 팬인가.
“확실히 ‘안녕히 계세요’는 게스트끼리 대화는 그다지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다른 예능과 다르게 일반인 중에서 특이한 고민이 있는 사람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그 방송은 게스트라고 해도 그저 자리에 앉아서 맞장구를 칠 뿐이라 한자리에 있음에도 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적었다.
건우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여배우들 앞에서는 오히려 그 여배우가 반할 정도로 멋지게 행동하는 주제에.
“아이고.”
확실히 김우연이 누군가와 친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꽤나 오랜 기간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뭔지 모를 박력까지 풍겨 오는 터라, 언제나 무표정인 것이 한몫하여 고고한 한 마리의 검은 늑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였다. 그렇기에 다른 배우들 또한 함부로 말을 못 건다고는 하니,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형.”
“왜.”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던 건우가 자신을 부르는 이연에 짧게 대답을 내뱉었다.
“이번에 비는 날 적당히 나눠서 5개 정도 ‘소리’ 영화표 예매해 줘.”
“…….”
“첫 개봉일은 반드시 해 주고.”
“너 기사 뜨고 싶냐.”
너 이 새끼. 탑배우 이연이 같은 영화를 5번이나 본다는 것만으로도 기사감인데. 미쳤지 아주.
이번 역으로 인해 길게 유지하고 있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바라본 김우연이 살풋 인상을 구겼다. 아직까지 콸콸 차가운 물을 쏟아내고 있는 수도꼭지를 누른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앞의 거추장스러운 것을 치워 냈다.
이번에 개봉하는 ‘소리’에서 맡은 역은 여자 3명을 죽이고 아이 한 명을 납치한 살인마였다. 언제나 음침하게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캐릭터이기에 어쩔 수 없이 유지하고 있는 머리는 퍽이나 불편해 보였다.
“홍보 스케줄은 아마 이게 끝일 테니까…….”
이제 슬슬 잘라 버려도 되겠지. 검은 눈동자가 가볍게 가라앉는 듯하더니 곧 다시 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슬슬 매니저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발걸음을 옮겨 화장실을 나서는 동안에도 그 냉랭한 기운은 그대로라서,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 거리를 두며 고개를 숙여 왔다. 그에 맞춰 간단히 인사를 건네주고 주차장으로 나와 아무 주저 없이 한 자동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고하셨어요, 형.”
“응. 다음은?”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래.”
뒷문을 열고 몸을 안에 집어넣는 동시에 기다란 몸을 말아 쓰러지듯 엎어졌다. 여태까지 풍겨 오던 분위기는 도대체 뭐였는지, 아직까지 불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사내의 그런 행동은 이제 와서는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이 그의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촬영 4시간 정도 했는데, 아직도 그래요?”
“응…….”
최대한 진동 없이 출발하는 자동차 의자에 얼굴을 그대로 파묻은 우연이 피곤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 형 어쩌면 좋아요. 그의 어린 매니저가 몇 번이나 같은 걱정을 하며 여전히 천천히 차를 몰았다.
김우연. 28살. 182cm에 67kg. 샤인돌 소속의 배우로, 악역이라고 하면 바로 그가 떠오를 정도로 평소에도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로 유명한 사내. 특징.
“속 울렁거려…….”
멀미가 심함.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