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사진을 보고 있자면, 잊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감정이 어렴풋하게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가 다시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늘 가까이에서 맡아왔던 체취가 다시 코끝을 향기롭게 간질이는 것 같기도 하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내게 와 안길 것 같은 표정을 짓는가 하면, ‘찰칵’ 하고 셔터 소리가 나면 뒤를 돌아 환하게 웃을 것도 같다. 또한 언제 어디에 갔었는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등의 ‘이미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음직한’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까지 바로 어제 일처럼 세세하게 떠오르게 한다. 모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미 과거가 된 시간들임에도 사진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랜 시간 고스란히 간직된 숨결은 삶의 흔적까지도 더듬어 추억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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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렌즈를 통해 필름에 맺힌 결과물보다 사진을 찍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잘 찍은 사진인지 아닌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빼어나지 않을지라도, 내게는 모두가 더 없이 소중한 ‘사랑을 기억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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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진이란 잘 만들어진 결과물이 주는 만족감이라기보다, 미래의 어느 날, 문득 오래전 사진을 꺼내든 내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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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뒤, 습기로 가득한 숲 속 녹음(綠陰)의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아무 움직임도 없다. 신발은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바지도 무릎까지는 축축하게 젖어 있다. 머리카락은 비를 맞아 억센 풀줄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다. 무엇이 그 미소를 만들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다. 궁금하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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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잠을 자고 일어나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서 나누었다. 때로는 서로 생각이 같지 않아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사소한 말다툼으로 이어져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서로의 외로움을 끌어안고 기꺼이 용서의 눈물을 흘리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출할 때면 몇 벌밖에 없는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는 팔짱을 낀 채, 아무도 없는 골목을 지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불빛 사이를 걸었다. 파란색 칵테일에 취해 흔들리는 불빛과 함께 춤을 추었고, 값비싼 커피로 굶주린 영혼을 달랬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4개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왼쪽 어깨를, 그녀는 오른쪽 어깨를 비에 내어주고 걸었다. 길을 걷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서로의 얼굴 아래로 그려진 그림자를 보며 웃었고, 노란 백열등 불빛을 받으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처음 고백했던 그날처럼, 별이 내리는 날이면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고, 수없이 쏟아져 내리던 별들은 우리의 머리 위로 긴 불빛을 남기며 아름다운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기는 형형색색의 시끌벅적한 젊음으로부터 기꺼이 선택받지 못한 우리는 조금은 쓸쓸했지만 우리만의 화려하고 찬란한 젊음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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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되던 날, 구름 사이로 잠시 햇빛이 비췄다. 점심을 먹고 남쪽으로 향하던 우리는 급히 차를 세웠다. 마침 차를 세운 곳에는 잘 익은 노란 콩잎들이 미풍을 맞으며 춤을 추듯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고 있었기에 그 모습은 경박스럽지 않았다. 햇빛도 좋고, 배경도 좋다. 그 앞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기의 필름을 낮은 감도의 것으로 바꿨다.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수평을 잡고 있자니 그녀가 그 속으로 들어와 자세를 잡는다. 햇빛도 좋고, 배경도 좋고, 그녀도 좋다. 이제 셔터만 누르면 된다. 막 셔터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을 따라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린 뒤, 팔을 내리며 자세를 취하려는데, 그 순간, 다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p.87~88
오후 늦도록 눈은 그치지 않았고, 그녀의 볼과 코끝은 발갛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필름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K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두터운 담요를 어깨에 덮어 주었다. K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기념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러자 필름 표시 창의 숫자가 34을 가리켰다. 경험으로 미루어 4~5장은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다시 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얼굴과 풍경을 각각 한 장 찍었다. ‘징’ 하고 필름 감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과 풍경을 각각 한 장씩 더 찍었다. 역시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일 터, 특별히 신중을 가하기로 했다. 조금 더 나은 배경을 위해 꽁꽁 얼어붙은 개울가 근처까지 내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떨어지는 눈송이에 그녀의 얼굴이 가리지 않도록,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과 따뜻한 눈동자로 원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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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눈에 두 개의 작은 창문 사이로 걸어가는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이미 두 창문 모두 훌쩍 지나쳐 버린 뒤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몇 걸음 되돌아갔다. 내가 놓친 그 순간의 이미지를 최대한 떠올리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그녀가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그 순간이 찾아왔다. 플래시가 번쩍하고 새하얀 빛을 발했고, 골목은 마치 막 동이 트기 전 새벽과 같은 푸른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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