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들은 영국군들 속에 섞여, 매우 기쁜 표정으로 연신 영국군 차량 옆구리에 스텐실로 그려진 하얀색 별(UN군의 식별표지)을 가리켰다. 북한군들은 미소를 지으며, 영국군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환영의 뜻을 전하며, 담배와 이런저런 선물을 전해주었다. 지나가던 어느 북한 병사는 스코틀랜드인 병사의 등을 두들기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로스케!”
수수께끼는 풀렸다. 아가일 대대 병력이 사리원 북쪽에서 남쪽으로 들어왔기에, 다른 길로 도시에 들어온 북한군은 이들을 이 전쟁에 참전하러 온 소련군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아가일 대대의 장비를 보고 북한군은 한결 더 판단을 굳혔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뜨개질로 만든 캡 컴포터(cap comforter)라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착용하던 모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 병사들이 든 소화기는 미국제가 아니라 영국제였다.--- p.50
생각 있는 장교는 이렇게 서둘러 한국 파병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미들섹스 연대의 존 윌로비 소령은 이런 글을 적었다.
“우리 부대는 사실상 파병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여단 본부에서는 현 상황을 마치 동화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 파병이 워낙 성급하게 정해지고 실시되었기 때문에, 제27여단의 병사들은 자기 부대를 ‘울워스(Woolworth: 싸구려 물건을 많이 파는 백화점) 여단’ 또는 ‘신데렐라 여단’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또 어떤 병사들은 자신들이 파견되어야 할 만큼 사태가 긴급하다는 점에 빗대 자기 부대를 ‘닥치고 파병 여단’으로 불렀다.--- p.104
전선 후방에는 이 전쟁의 어두운 면이 숨어 있었다. 게릴라들은 군복을 입지 않기 때문에 양민들과 분간이 어려웠다. 따라서 비정규전에서 양민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없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대한민국 경찰과 기타 준군사 부대들은 게릴라들에 맞서 싸웠다. 불에 기름을 붓는 요소는 또 있었다. 한국 전통 사회에서 여성은 남자들이 정해 준 역할만을 수행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침략해 온 공산주의자들은 여성에게 더 많은 사회적 역할 수행을 약속해 주었고 주었고, 점령지에 여성위원회를 설치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내건 여성 해방이라는 미끼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p.150
사상자 1명이 발생했다. 중대에서 제일 키가 큰 병사였던 샤프였다. 버밍엄이 그를 진찰하러 갔다. 너무 어두워서 버밍엄은 샤프의 부상 정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샤프의 부상 부위를 보니 그가 참호를 자신의 키에 비해 매우 얕게 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버밍엄은 샤프의 머리를 더듬었다. 버밍엄의 손에 잡힌 샤프의 두개골은 넓은 부위가 깨져 깔쭉깔쭉해져 있었다. 박격포탄이 낙하했을 때 샤프의 머리는 참호 위로 튀어나와 있었고, 박격포탄 파편이 그의 머리에 명중하면서 상당 부분의 두개골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p.185
네이팜은 특유의 폭발음을 내며 폭발했다. 약간의 호박색 색조를 띤 검은색 버섯구름이 빠르게 하늘로 치솟았다. 용광로 같은 열기와 지독한 석유 냄새가 282지점을 휩쓸었고, 동시에 용암 같은 주황색 화염이 마치 장마철에 불어난 시냇물처럼 산꼭대기에서 산비탈로 터져나왔다. 최악의 오인 사격이었다. 폭심에 있던 하일랜더 병사들은 그야말로 ‘지상의 지옥’ 속으로 내던져졌다. 네이팜의 불길이 닿는 것이면 사람이건 나무건 돌이건 모조리 불이 붙었다. 장병들은 온 몸에 불이 붙어,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다가 쓰러져 숯덩어리로 변해 갔다.
머스탱 전투기들은 148지점에 급강하 기총소사까지 가했다. 지면에 작렬하는 기관총탄이 진지를 가로지르며 흙먼지를 높이 피워 올리자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참호로 뛰어들었다.--- p.205
미 해병대에는 AP 통신의 사진기자인 맥스 데스포도 있었다. 그는 서울 시가지에서 걸작 한국 전쟁 기록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진은 가장 인상적인 전쟁 기록 사진으로 남아 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전쟁에서는 한 프레임 안에 전투 중인 적과 아군을 동시에 담기란 극히 어렵다. 데스포는 무너진 시가지에서 꼼짝 못하고 있던 미 해병대 1개 분대와 함께 있었다. 병사들은 적의 저격을 받고 쓰러져 가고 있었지만, 적의 저격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 총성이 울렸다. 데스포는 몸을 돌렸다. 북한인민군 저격수가 배수로의 시멘트 블록 아래에 숨어, 불과 수 미터 떨어진 해병대원들의 발목 높이에서 총을 쏘고 있었던 것이다. 데스포는 말했다.
“운이 다한 것인지 본능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적 저격수가 몸을 일으키자 해병대원들이 사격을 가해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세 명의 해병대원들이 불과 5m 떨어진 곳에 엎드려 있던 북한 저격수를 쏘아 죽이는 모습을 촬영했다.--- p.244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다이하드 병사인 줄리언 툰스톨은 이 전쟁의 두 가지 측면인 ‘인종 차별’과 ‘가혹한 파괴’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북한군 포로 3명이 살이 패일 정도로 채찍질을 당해 가면서 지프 트레일러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영국군 하사관이 그중 한 명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고 나서 세 명은 억지로 발가벗겨지고 몸을 씻겼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조롱해 댔다. 톰슨은 이런저런 무기를 만져 보면서 ‘국’들을 죽인 것을 논하는 동료 기자들을 역겨워했지만, 병사들에게는 유혹이 클수록, 그것을 실현할 기회도 컸다. 도덕과 양심의 구속에서 벗어나 살인과 파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잔인한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영국군의 병사들은 암흑의 심연 속에 들어갔다.--- p.453
평양 시민 상당수는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모래주머니로 보강된 부교는 군부대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엄중히 경비되고 있었다. 대동강을 건너려는 피난민들은 강가만 얼어붙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거나, 얼마 없는 배를 타야 했다. 또 다른 방법도 하나 있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후퇴의 와중에 휩쓸린 사진기자 맥스 데스포는 그 또 다른 방법이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배를 타고 가는 피난민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 그는 어떤 광경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곶으로 향하는 강변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그 광경은, 부러진 대동강 다리의 대들보 위에 피난민들이 잔뜩 올라가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데스포의 말이다.
“그 사람들은 약간의 소지품을 짊어진 채, 대들보에 매달려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어요. 정말 엄청난 노력이었지요. 그 장면을 본 순간 가슴이 찡했어요. 기계식 카메라를 감아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너무 추워서 사진을 8장밖에는 찍지 못했어요.”
그는 지프로 돌아가 후퇴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이 한국 전쟁을 상징하는 작품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p.512
병사들이 총에 맞기 시작했다. 페인은 미군 부상자를 흘깃 보았다. 길옆에 앉아 있던 그는 얼굴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아 있더군요.”
극도의 추위가 중상자의 부상에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장진호 전투의 무서운 특징 중 하나였다. 추위 속에서 혈액은 응고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얼어 버린다. 그 결과 사지를 잃는 등 상온에서는 즉사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부상을 입더라도, 여기서는 어느 정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따뜻한 곳에 갈 때까지만이었다. 그런 곳에 가서 혈액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 사람들을 살릴 확률은 낮았다.--- p.550
임금숙의 사촌이 말한 배는 화물선 SS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였다. 그 배는 흥남 부두를 떠난 마지막 민간 선박이었다. 이 배의 선장인 레너드 라 루는 정박 명령을 받지 못했으나, 쌍안경으로 탈출을 바라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을 보고서 자원해서 흥남 부두에 들어왔다. 12월 22일 이 배는 흥남 부두에 입항했다. 라 루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이가 8~10명 정도 있는 식구들도 있었어요. 바이올린을 든 남자, 재봉틀을 가진 여자, 세쌍둥이를 이끌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도 있었지요. 그리고 부상자 17명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들것에 실려 다녀야 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아기들 수백 명도 있었어요.”
사실 이 배의 설계상 승객 정원은 12명에 불과했지만, 밤사이에 한국인들은 잔뜩 몰려왔다. 이 배의 통로를 가득 채운 한국인들 중에는 임금숙 가족도 있었다. 이들은 흘수선 아래 선실에 위치한 선반으로 떼밀려 가 자리를 잡았다. 그곳도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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