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및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오꾜오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공저로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 변동』, 역서로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근대초극론』 『예외상태』 『정치신학』 『세계를 아는 힘』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공역) 등이 있다.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동아시아는 낡은 질서의 위기와 새로운 질서의 부재 속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한국-대만을 잇는 동아시아 반공체제는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 있지만, 그것이 향후에도 구속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규범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머무르고자 했던 저 중역의 지대는 여전히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상력을 배양하기 위한 자리다. 주권의 번역과 수용으로 독립 주권국가의 성립이 바로 국가의 위기 초래와 중첩되는 역설적 공간 속에 내던져진 근대 동아시아의 정치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37면)
10분 동안의 연설 뒤 “텐노오(天皇) 폐하 만세”를 세번 외치고 미시마는 다시 총감실로 돌아와 준비했던 의식(儀式)을 거행한다. “총감에게 원한은 없습니다, 텐노오 폐하께 자위대를 돌려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유감을 표한 뒤, 미시마는 상의를 벗고 미리 지참했던 단도를 꺼내 할복 의식을 거행한다. 그가 복부를 찌르고 왼쪽으로 배를 가름과 동시에 뒤에 대기하던 ‘방패의 모임’ 대원이 카이샤꾸(介錯, 할복한 자를 돕기 위해 검으로 목을 베는 일)로 의식을 마무리했다. 함께한 네명의 대원 중 한명이 미시마를 따라 자결했고 나머지 세명은 곧바로 체포돼 경찰로 이송됐다. 총감실에는 동체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머리가 덩그러니 남았고, 즉시 출동한 경찰이 현장을 검증한 후 시체의 동체와 머리를 재봉합해 가족에게 보냄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것이 일본 사회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미시마 사건’의 간략한 전말이다. 현실정치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 사건은 오해의 여지없이 극우파의 광기 어린 테러와 자해극이다. 당시 많은 이들은 미시마의 행동이 법치를 무시하고 파괴하려 한 허황된 쿠데타 기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근대적인 법치나 제도정치라는 인식틀을 정지한 다음, 미시마 고유의 예술관 속으로 재전위하면 이 사건으로부터는 전혀 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89~90면)
여기서 이광수 개인의 친일을 단죄하는 입장은 검토를 요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이광수가 이 글의 관심이 아닐뿐더러, 친일이라는 전제 위에서 식민지 치하의 정치?문화?사회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민족이 민족주의 없이는 실존할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민족을 민족주의에 앞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는 도착적 의식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민족은 오래전부터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며 살아온 인간집단을 민족으로 사념케 하는 민족주의라는 실천을 통해 비로소 실존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의 친일은 한반도에서 펼쳐진 민족주의의 한 양상이지 반민족행위가 아니다. 그의 친일이 한반도에서 민족이 실존하기 위한 사념을 나름의 방법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128~29면)
두 사람에게 ‘아시아’는 근대 유럽의 ‘정치적 원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장이었다. 마루야마는 그것을 끝나지 않는 ‘근대’의 완성, 즉 무한한 결단의 반복인 ‘결단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이라 정의했고, 타께우찌는 유럽적 근대세계에 대한 근원적 관계설정을 ‘절망’과 ‘저항’으로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고 정의했다. 이들의 이러한 언설은 근현대 일본 사상사 속에서 어떤 때에는 노예적 욕망의 표상으로서(아시아주의-대동아공영권), 또 어떤 때에는 노예적 자기상실의 변명으로서(순수일본-문화국가) 발화된 ‘아시아’를 ‘정치적 원리’의 근원으로 재탈환하려는 시도였다. (234면)
이렇게 그는 1945년 이후 아시아에서 벌어진 혁명과 전쟁이라는 국제적 사건을 전후 일본 국민의 주권의식과 연결시킴으로써 앞에 길이 놓여 있지 않은 동양의 저항을 위한 길을 개척하려 했다. 그는 태평양의 해적선을 노예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종국에는 선상 탈취 끝에 해적선이 될 수밖에 없는 노예선의 선상 반란이 아니라, 노예선 자체의 항해를 멈추고 항로 없는 망망대해에 표류하며 길을 모색하는 난파선의 고통을 일본 ‘국민의 반복적 재형성’을 위한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270~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