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할 때는 세상의 진면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려올 때는 세상의 참모습이 보인다. 잘 나갈 때는 그 사람의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려올 때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정상에 오르게 한 바로 그 이유가 그를 추락하게 만든다. 자신감은 바로 그 자신감이 독이 돼 추락하며, 정의는 바로 그 정의 때문에 몰락한다. 그를 비판하고 손가락질했던 이유가 실은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준 힘이다. 현실적인 사람은 바로 그 현실성으로 자신의 세계를 일궈내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이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결정적일 때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삶에서 수많은 반전反轉을 목격하거나 체험했다. 악연에서 출발했으나 평생 인연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이 훗날 형편없이 그릇된 것임을 깨달은 적도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이가 어이없게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것도 보았으며, 악마로 여겼던 이가 도리어 내 삶에 희망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 반전과 반전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인간 개인이 얼마나 무지하고 취약하고 불완전하며 동시에 위대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상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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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치소가 지금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온 1987년 이전, 서울 현저동 구舊 서울구치소 시절엔 ‘지옥 3정목’이라고 불리던 샛길이 있었다. 의무실로 가는 길에 사형장으로 꺾이는 왼쪽 길목을 말했다.
옛날에는 사형수들이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이쪽으로.”라는 말에 사형수는 순간 멈칫하고 교도관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다. 그런 시선으로 멀리 산을 보고 푸른 하늘을 보고 뒤돌아 사방舍房을 쳐다본 후 고개를 푹 떨군 채 땅을 보고 걸어갔다는 것이다.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였던 이정재는 여기서 평소의 의연한 자세를 잃고 “이놈들이 날 죽인다.”고 고함을 지르며 버텼다. 연예계 대부로 군림한 임화수는 “엄마, 나 죽기 싫어.”를 연발하며 어린애같이 엉엉 울고 발버둥 치다 끌려갔다는 얘기가 교도관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죽은 축에 속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김씨는 처형 직전 스님의 집례를 거부했다. 그러나 두 손으로 꼭 쥔 염주를 굴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복창했다. 그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유언을 했다.
“날 죽일 필요가 없잖아. 이건 크게 잘못하는 거야.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유언이 조리를 잃고 비방으로 발전하자 집행관이 눈짓을 했다. 집행자들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뒤에서 두건을 씌웠다. 염주알을 잡은 김씨의 두 손이 더욱 다급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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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돈은 1989년 퇴임 후 공직 제의를 일절 뿌리친 채 40여년 전 마련한 서울 양천구 목동 집에서 중풍 걸린 아내를 수발하며 산다. 그리고 늘 허름한 점퍼를 걸치고 보수단체 모임에 나가 묵묵히 도와주며 나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노태우 정권 때는 물론 DJ, JP 측에서 서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군인 외의 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다.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서울 출신인 그는 휘문중 3학년이던 만 15세 때 6·25가 터지자 학도병으로 참전해 총상을 입기도 했다. 고된 군대생활도 그에게는 낙樂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엄하게 다뤘다. 원칙에 어긋나거나 꾀를 부리면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러나 가난한 휴가병에게는 주머니를 털어 차비와 닭 한 마리 사갈 돈을 쥐어줬다. 연대장 시절 참모들이 만들어준 기념패에는 ‘차갑고도 뜨거우며, 무섭고도 인정 많은 연대장님께’라고 씌어 있었다. 그의 집에는 지금도 수십 년 전 부하들이 찾아온다. 채소나 곡식을 가져오기도 하며, 자식 결혼식에 주례를 부탁하기도 한다.
인간 민병돈을 볼 때마다 나는 ‘하심下心’을 느낀다. 불교 용어로 하심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다. 그는 위만 바라보기 쉬운 군대라는 계급 사회에서 드물게 아래를 굽어 살피며 살아온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부하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원칙에 맞게 살며, 전투를 잘하는 군인으로 만들 것이냐가 그의 주관심사였다. 3성 퇴역 장성인 그는 골프도 안 친다. 심지어 자동차나 휴대폰도 없다. 잘난 체하지도, 무용담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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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와 고등학교, 대학 선후배 관계로 공·사석에서 가끔 만났다. 2004년께인가 그는 신문 기자이던 내게 말했다.
“요즘 글쓰기가 어렵고, 신문·저널 읽기가 고통스럽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의견을 사실처럼, 사실을 의견처럼 말한다.” (...)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언어에는 날 선 감정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부터 말의 품위를 잃고 막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공식석상에서도 욕설이 버젓이 등장했다. 김훈은 언어의 폭력화·무기화를 지적했다.
(...) 그는 기자는 “본질적으로 문장가가 아니라 스파이”라고 규정했다. 지난至難한 사실 확인fact finding 작업을 거쳐 정보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A란 사람을 ‘개자식’이라고 하고 싶어도 그렇게 쓰는 순간, A가 아닌 내가 개자식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A가 개자식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물증을 찾아야 한다.”
어느 날에는 우리의 사고思考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요즘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 ‘왜 이런가?’,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는 어떤가?’ 등의 과학적 사고 대신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내 생각과 맞나, 안 맞나?’, ‘내 편인가, 아닌가?’ 식의 정서적·이념적·정치적 생각을 한다. 신념의 언어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로 사유思惟해야 한다.”
(...) 술이 얼근히 들어가면 김훈은 그 큰 눈을 똑바로 뜨고 후배 기자들을 질책했다.
“지배적 언론이나 담론들이 당파성에 매몰돼 그것을 정의·신념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 찬 자들을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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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중 나는 조영래에게서 진정한 ‘사람다움’을 느꼈다. 그는 늘 조용했다. 목소리도 나직했다. 사유의 시간이 많았다. 재떨이에는 항상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그러나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위 따위는 그냥 던져버렸다.
조영래를 꿰뚫고 있는 성격적 특질은 무엇일까? 나는 ‘온유溫柔’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내지 않고, 오래 참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모진 민주화 투쟁에도 부정 대신 긍정을 이야기했고,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절제했으며, 정의롭게 살면서도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지인이 그를 비난하며 머리에 맥주를 끼얹어도 마치 ‘구도자’처럼 묵묵히 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험한 시절,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핍박받았던 조영래는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 지난날 힘든 시절을 겪었다고 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 세상을 미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한때 자신들의 고난이 영원한 훈장인 양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심지어 이 땅에서 축복받고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고서도 증오의 언어와 감정을 여과 없이 배출하는 21세기 지금의 모습은 조영래가 그리던 우리의 미래는 아니었다.
분노는 쉽다. 그러나 참고, 용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나 스스로 세상살이가 힘들고, 심성이 강퍅해질 때 30년 전 조용히 세상을 바꾸어 나가던 조영래의 온유한 모습이 생각난다. 그 조영래가 지금은 없다.
--- p.36
이튿날 새벽, 나는 눈을 뜨자마자 호텔로 달려갔다. 삼엄했던 경비는 풀렸다. 나는 호텔 안내 데스크로 가 점잖게 말했다.
“홍콩서 온 한국 사업가인데 귀빈 접대를 위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예약할 생각입니다. 우선 방을 직접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담당 직원은 순순히 나를 10층 김정일이 머물던 방으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청소부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김정일이 자던 침실로 들어가자, 황당한 풍경이 들어왔다. 이불은 제멋대로 구겨진 채 침대 한쪽에 놓여 있었고 시트도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젊은이들이 한바탕 밤새 놀다간 풍경이었다.
방구석 이곳저곳에는 청소부들이 정리해놓은 수십 병의 빈 술병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럿이 모여 술을 즐긴 듯 헤네시 XO 등 코냑과 이름 모를 프랑스산 고급 와인, 그리고 ‘정보원’ 말대로 스페인산 와인과 페리에 빈 병들이 즐비했다.
이 방이 정녕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머물다간 방이란 말인가. 나는 여기서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격國格을 떠올렸다. 최소한 밑에 비서들이라도 떠날 때 정돈은 하고 가는 게 예의 아니던가.
내가 사진으로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안내 직원이 촬영을 제지했다. 곧이어 그가 든 워키토키가 시끄러워졌다. 호텔 측에서 CCTV를 보고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빠져나온 나는 비상구를 이용해 계단으로 내려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의 침실을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인 듯싶었다. 그러나 왠지 입맛이 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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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1월, 신승남 검찰총장을 중도 하차시키고 검찰을 떠나 변호사 생활을 하던 이명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명재는 8개월 전 서울 고검장으로 있다가 신승남 검찰총장 체제가 되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다음 검찰총장을 기대할 수 있는 위치인데도 후배들을 위해 ‘용퇴’를 했다. 그런 그가 권력 말기 온갖 악재에 휩싸인 DJ 정권의 구원투수로 발탁된 것이다. 집권 말기 권력 누수 현상에다 대통령 아들들을 둘러싼 비리 의혹까지 터져 나오는 판에, 김 대통령이 검찰을 떠난 TK 출신 인사를 사정기관의 총수로 앉힐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이 위중했던 것이다.
평소 과묵하던 이명재 검찰총장은 취임사에서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검사들의 명예심을 촉구한 이 말은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는 취임 후 개인 사물私物을 단 한 개도 가져오지 않았다. 책장에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았고, 매일 들고 다니는 ‘007가방’이 전부였다. 언제든지 총장직에서 떠날 각오가 돼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의 지시는 단 두 마디였다.
“최선을 다해 수사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