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을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 생생한 개성을 접할 수 있는 것인데, 단순하게 개성 환원에 멈추지 않는 넓이가 발생한다. 일본인에게 ‘나’의 존재나 형태라는 문제로 들어가는 절호의 비상구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 p.20
근세에 이르러 각 장르마다 각각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며 지난 세대와 스스로를 구분하는 분명한 특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시에서는 중세적인 렌가(連歌)를 대신해서 하이카이(俳諧)가 출현했고, 희곡에서는 노(能), 교겐(狂言)을 대신하여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가 등장했고, 또 산문문학에서도 여러 가지 근세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눈부신 움직임 속에서 “자조성(自照性) 문학이라고 불리는 일기와 기행 종류만이 명확한 변형 전개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나카무라는 말하고 있다. --- p.21
일본인은 세계에서 드문 문학적 국민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 일찍이 폭넓게 보급되었다는 지반뿐 아니라, 문자 그 자체에 대한 주물 숭배(呪物崇拜)와 가까운 뿌리 깊은 애호와 집착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한편으로 이런 양식과 형태에 대한 애착은 반드시 문학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는 특색일 것이다. 이를테면 노(能)나 가부키, 회화의 경우에도 양식화에 대한 손질과 그 지속에 대단한 힘을 쏟아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22
일반적으로 자서전이라는 말은 서구에서도 극히 새로운 것인 듯하다. 영어의 autobiography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NED(New English Dictionary,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옛 명칭)에 따르면 1809년이라고 한다. 일본어의 경우는 분명히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후쿠옹 자서전](1899) 정도가 가장 오래된 보기가 아닐까? --- p.36
이것은 건실하고 꼼꼼한 에도 시대 인간의 평균적인 일상의 도덕률, 따라서 판에 박힌 상투어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스즈키 보쿠시는 철저한 실천주의자였다. 그가 말하는 ‘세상살이’에도 ‘즐거움’으로 삼은 글쓰기에도 언제나 실천에 집착해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자서전에도 때로는 멋없이 느껴질 정도로 공상적인 요소나 허황한 부분은 모두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하나의 자아로 완전히 현세적인 충족태도를 보였는가 하면, 도저히 그렇게는 단정할 수 없다. --- p.53
첫머리의 일화라는 것도 그의 유학 중의 경험과 관련된다. 3년 반 동안의 미국 체재 중에 그는 자주 종교적인 집회에 초대받아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회의 회장 혹은 여자 회장”이 반드시 꺼내는 말은 “15분 안에 이야기하라”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결국 “훌륭한, 어느 훌륭한 박사가 나머지 시간을 채울 예정이니까”라고 우치무라는 재빨리 빈정거리는 주석을 넣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신귀국자’다운 미국식의, 무례한 미국 유머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인 고백의 ?서문?으로는 참으로 전투적이고 조소적인 태도가 노골적이다. --- p.59
그런데 이런 후쿠자와의 참으로 해방된 자아는 돌연변이 현상으로 보아야만 될 것인가? 1835년생인 후쿠자와는 우선 완전히 메이지 유신 이전 세대에 속한다. 유신이 일어난 해에는 그는 벌써 30대 중반이었고, 고이즈미 신조(小泉信三, 1888~1966)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유신으로 ‘2등분’ 되는 것이 후쿠자와의 생애였다. 1861년생인 우치무라와는 거의 완전히 한 세대의 차이가 난다. 우치무라가 오카쿠라 덴신이나 니토베 이나조, 그리고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오가이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과 함께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 인간이었음에 비해서, 후쿠자와는 그 생애의 절반을 완전히 봉건적인 것 속에 담근 구세대의 일원임에 틀림없었다. --- p.103
고백하기 힘든 일까지 프랭클린은 감추지 않고 쓰고 있다. 그것은 친구인 라프의 애인과의 관계다. 두 사람이 살고 있던 하숙에서 알게 된 젊은 여성이자 “활발하고 대단히 즐거운 이야기 상대”인 미시즈 T와 라프는 곧장 친해져서 동거하기에 이르렀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라프는 혼자 낙향해서 생활을 재건하려고 했다. 혼자 남겨진 여성이 애인의 친구를 의지하며 조언과 원조를 구하기에 이르는 것은 정해진 줄거리이고, 프랭클린 청년도 친구와 동거하기 위해 직업까지 잃은 T를 자신의 처지로 생각해서 돌보아준 듯하다. 그런데 그때 특별히 우리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그 뒤의 일, 아니 그것을 고백하는 프랭클린의 말투이다. --- p. 125
이 아버지상은 하쿠세키의 분신이 아니고, 어리광의 대상도 아니었는데 ‘분노’를 계속 불태우면서 견디어내고 이 자서전을 완성시키기 위한 안내의 끈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세상을 살아갔던 아버지의 상을 저편에 두는 것이 하쿠세키 나름의 자기주장과 자기인식의 용수철이 되고 지렛대가 되었다. 여기에는 안이한 자기동일화의 도취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이질감을 인정한 다음에 연속성의 확인이 있다. --- p.175
말하자면 전국시대 무사의 체질과 태도를 그대로 평화의 시대로 파고든 것에 소코의 문제가 있었다면, 이것을 아버지의 이미지로서 대상화함으로써 다른 자아의 조형(造型)과 정착에 열중한 것이 하쿠세키의 문제였다. 그러면 하쿠세키로부터 1세기 뒤의 [우하인언]의 저자의 경우는 어떤가? 서로 연결되면서도 각각 명확한 다른 극(極)을 만들었다. 이른바 에도적 자서전의 삼각형, 무사적 에고의 세 폭의 족자에서 한동안 계속 눈을 뗄 수가 없다. --- p.203
사다노부가 에도로 돌아온 날 밤, 특별하게 미녀를 그냥 둔 것은 실은 나이 든 여인들의 배려와 계획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28세의 독신 주군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살핀 조치였음은 ‘오늘 밤은 어떻게 할까요?’라고 일부러 물어보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사다노부는 이것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함께 방에 들어가 ‘같은 침상에 들어가’면서 상대를 안지 않았다고 한다. 사다노부가 이것을 이른바 하나의 승리의 기록으로 ‘범정’을 극복한 빛나는 훈장처럼 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극기심의 ‘수행’을 위한 마음을 다진 실험이었을 것이다. --- p.215
또다시 이별의 비애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온 밤 잠들기 어려워서 꾸벅꾸벅하다가는 곧 눈이 뜨인다.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귓가에 들리는 것, 모두 정과 관련된다”는 한 줄이 선명한 효과를 내고 있다. 초우(蕉雨)는 파초에 떨어지는 비를 말하는 것일까? ‘한 점 근심의 등불’이라든가, 파초라든가, 계절은 분명히 가을이다. 익숙하게 들었던 ‘파초에 떨어지는 비’가 헤어진 직후의 오늘 밤만은 평소와 달리 마음에 젖어든다고 청각의 이미지로 일관하고 있다. --- p.247
주샤는 언제나 무대의 어휘와 연기의 메타포로 말하고 있다. 죽음을 결행한 순간까지도 ‘그다지 전에 연습한 것도 아닌데’라고 했고, ‘무대를 그대로 하였다’고 그리고 있다. 후년의 회상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가 생생한 행위이고, 어디부터가 연기인가? 현실과 연기와의 경계는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참으로 허실피막(虛實皮膜)의 사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계의 위험함, 규정하기 어려움이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