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신을 향한 가장 지독한 복수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신의 말씀을 정반대로 거스르고 싶었고, 내가 당한 실연과 배신의 고통을 모든 여자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진심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고, 덤으로 얻은 인생이었다. 밤마다 술을 마셨고, 내로라하는 바람둥이들과 어울리다, 유흥의 길로 빠져들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픽업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 여성을 유혹하는 기계가 되어야만 했기에 철저히 계획된 시나리오 속에 나 자신을 맞춰야 했고 내 안의 진심은 지워버려야 했다. 결국 그 세계에서의 명예와 돈을 얻었지만, 내 감정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대인기피증까지 찾아왔고,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극심한 우울증이었다. 그 시기에 한 번 더 자살 시도를 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또 다시 죽음을 택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나락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과거의 상처와 거짓된 삶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본래의 나를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 pp.30-31
새벽 2시경, 주방 청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엄청난 양의 폭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쓰레기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운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온몸에 비를 맞아가며 쓰레기장 문을 열려는데, 늘 가동 중이던 냉동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비 때문에 얼른 해치우고 싶기도 했고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지옥의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 천여 마리가 쏴- 하는 소리를 내며 우리 몸에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벌레들이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 가동하는 냉동 시스템을 담당자가 실수로 끄고 퇴근한 것이 문제였다. 혼비백산이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 바퀴벌레들을 피해 온 동네방네를 뛰어다녔다.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비 오는 쓰레기장에서 광란의 셔플 댄스를 추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p.56-57
하루는 일 끝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아차, 노트북을 켜놓은 것이다. 그 영상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푹 자고 싶어서 노트북을 찾아보았지만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나?’ 하면서 귀를 만졌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내 귀에는 계속해서 그 소리가 들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머릿속에서 들렸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미 그 영상의 소리가 싹 다 외워져 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침대에 앉은 채로 멍하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잇 겟츠 륄리 샛 앤 듀레매뤽.’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 소리를 정확하게 따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같이 일하는 호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이죠? ‘잇 겟츠 륄리 샛 앤 듀레매뤽?’”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물어보는 이 문장, 즉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소리’ 형태의 말을 호주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영어로 설명해주었다. ‘It gets really sad and dramatic.’ --- pp.99-100
우선 유튜브 검색 창에 ‘learn English’라고 간단하게 검색하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무료 영어 강의들을 볼 수 있다. 영어 초급 편부터 시작하여 고급 클래스까지 다양한 난이도의 영상이 있는데, 우선 무작정 클릭하여 편한 마음으로 들어보자. 영상의 70~80%가 들리는 수준,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영상이 자신에게 가장 적당하다. 너무 쉬우면 공부가 금방 지루해질 수 있고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보다 약간 수준 높은 영상을 추천한다. 요리에 미쳐 있는 한 친구는 허구한 날 요리법, 요리 강의, 요리로 하는 여행, 요리 콘테스트 등 요리에 관련된 모든 콘텐츠들을 유튜브로 시청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이기에 영어가 100% 이해되지 않아도 손쉽게 몰입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계속 밤낮을 보다 보니 요리에 관련된 단어들이 저절로 들리고 외워졌다. --- pp.106-107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는 진짜 사막. 갑자기 차가 좌우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오른쪽 앞바퀴와 뒷바퀴가 동시에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차는 점점 광기어린 질주를 하다 도로를 벗어나 나무를 향해 돌진한 뒤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꾸로 뒤집히고 말았다. 유리창은 전부 박살나고 지붕은 완전히 찌그러졌다. 우리의 2,700달러짜리 전 재산,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우리는 그렇게 두 바퀴를 굴렀다. 그저 죽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차는 원래 상태 그대로 쿵 하고 떨어져 멈춰 섰다. 보닛에서 허연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영화에서 봤던 차량 폭발 장면이 떠올라 일단 내리라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그나마 비추던 라이트마저 꺼지니 사막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암흑 그 자체였다. --- pp.146-147
혼신의 힘을 다해 전 지역을 돌며 알아봤으나 돌아오는 건 자리가 없다는 소식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타이밍이 어긋날 수가 있을까. 시티에 갔으면 일을 구했어도 벌써 구했을 시간이었다. 총 80장이 넘는 이력서를 돌렸고 영어 실력도 웬만한 외국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했지만 현재로선 불경기라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다. 약 20여 일 동안 차에서만 거주했기에 단 한 번도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술 취한 애버리진들의 공격이 있을까 두려워 잠은 꼭 경찰서 앞 주차장에 대놓고 잠을 청했다. 샤워도 할 수 없었고, 얼굴과 목과 팔과 겨드랑이 그리고 발까지 모든 세면은 물티슈 하나로 해결했다. 하루는 아무도 없는 공중 화장실에서 잠을 청하다가 경비원에게 걸려 쫓겨나기도 했다. 우리는 총 19일 동안 4,420킬로미터를 달렸고, 호주 생활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간들이었다. --- pp.201-202
나는 슈퍼바이저로 승진했고 상황은 180도 바뀌어 이른 아침 오피스로 출근하여 업무를 정리하고 있으면, 나를 그렇게 무시하던 그 여성 셰프가 아침 식사와 커피를 내게 가져다주게 되었다. ‘일개 아시아인’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현지인을 감독하는 슈퍼바이저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남달랐다. 어느 새 내 연봉은 8,845.5달러(당시 환율로 약 9,000만원)가 되어 있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이상의 임금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꿈꿔왔던 ‘연봉 1억’을 이룬 셈이다. 돈과 영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1억 신화는 허상일 뿐이라고, 그저 문화를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워킹홀리데이는 충분하다고, 수없이 들어왔던 말들이 틀렸다는 것을 나는 몸소 증명해냈다. 돈과 영어는 물론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들을 가졌다. 가장 귀한 성공은 바로, 나 스스로가 변하고 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 pp.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