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노가다 회사에 들어와 일할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이라니, 어떤 자신 말인가요?”
“여긴 매사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신사 회사가 아니올시다. 잘못하거나, 재수 없으면 얻어맞기도 하는 회삽니다. 특히 왕 회장님을 직접 모시고 일하는 특수 부서라 더 그렇습니다. 그 어른은 화가 나면 상대가 누구든 조인트부터 까고 보거든요.”
“설마, 회장님이…….”
“과장법으로 확대해서 말한 게 아니니까, 그런 각오가 돼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솔직히 권도혁은 미묘한 흥분마저 감지했던 터였다. 이름하여 직업적인 호기심 발동이었다. 아니, 그처럼 솔직한 표현을 쓸 수 있는 김석호 부장에 대한 또 다른 호기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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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뿔도 아닌 자식들이 관속배라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앉았으니, 이 나라 경제가 온전히 발전할 턱이 있는가 말야. 지금까지 우리 명광그룹이 그 관속배 말대로 움직였다면 진작 보따리 싸 가지구 저잣거리에 쪼그려 앉았을 거라구.”
그러니까 경제 문제 하나만은, 그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 그 자신이 세운 이론만이 정상적인 것일 뿐 다른 쪽의 그것은 아예 무식하거나, 어느 한편에 기울었거나, 너무 유식하거나 해서 깡그리 비현실적인, 그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판국에, 권도혁이 소설가적인 애매한 안목으로 경제 칼럼을 썼으니, 왕득구 회장의 그 까다로운 눈에 들어 채택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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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부럴노무 경우가 어디 있노!”
“왕득구 그놈, 순전히 사기꾼 아니가?”
“누가 첨부터 돈 달라 했나? 와 가만있는 사람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는 기가?”
“그래, 돈 많은 재벌 영감은 시퍼런 거짓말을 해도 죄가 안 되는구마, 더런 놈덜!”
하나, 아무리 씨부리고 또 씨부려도 바윗돌에 계란 던지기 식이었다. 누구 하나 말상대해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고향에 벌여 놓은 일들을 해결할 그 어떤 대책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적막공산의 연속이었다.
결국은 그냥 당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을 생기지 않았던 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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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었다. 노동의 노 자만 나와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특히 조간신문이 더 그랬다. 곧바로 반응이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회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장실, 부사장실, 전무실, 상무실, 심지어 이사들까지 마치 나한테도 입이 붙어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차별 공략을 서슴지 않았다.
“홍보는 뭐하려고 있는 부서야. 그런 거 하나 못 막구 말야!”
“기자들 촌지는 촌지대로 매월 정기적으로 나가고, 기사는 기사대로 매일 터지구!”
“바보 같은 놈들.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건데, 그렇게 감들을 못 잡아?”
“안 되면 육탄으로라도 막아야 될 거 아냐?”
실제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전화벨만 울리면, 덜컹 가슴부터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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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하지 말고 똑똑히 보고해!”
“알겠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높은 곳에서 나온 분들이 특별 근무 중이었습니다.”
“특별 근무 중이라니?”
“청와대 경호실 말입니다.”
“아니, 그런 곳에 대통령이라도 납시었단 얘기야, 뭐야?”
“바로 맞히셨습니다, 계장님.”
박광우 계장은 뭔가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 아뿔싸였다. 오 형사가 보고를 계속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가 묵고 계신 게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만한 병력이…….”
박 계장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 별장이 청와대 소윤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 꺼야?”
“명광그룹 왕득구 회장 개인 별장입니다.”
“명광그룹 왕득구 회장이라? ……그런데 왜 대통령께서…….”
“본래 정치가들은 재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왕 회장이 각하를 초대했다, 그 말인가?”
“말 그대로 정경유착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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