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40여 년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 중에 먹는 것과 관련된 일이 과연 있을까 싶다. 기념 파티나 친목 모임이 아니라, 타액 분비와 씹기, 연동 운동으로 이뤄진 행위 자체와 관련된 일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식사는 매일 하는 일인데도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좋아하는 영화나 믿음직한 친구들, 졸업식 등은 훨씬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음식을 입속에 넣는 일보다 영화, 우정, 교육 등이 내겐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럼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식단을 짜는 일, 장을 보
는 일, 준비해서 조리하는 일, 상을 차리는 일, 부엌을 치우는 일에 쏟아부은 시간을 모두 합치면 영화 마음의 고향(Places in the Heart)/B에 대한 애정은 아주 부차적이고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에 대한 애정, 심지어는 내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남편보다는 점심 식사를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시간이 남으면 레몬 머랭 파이를 먹은 것을 후회하며 내일 아침은 거르겠다고 맹세하거나, 냉장고를 열어 보고 먹다 남은 펌프킨 커스터드를 해치우려다 꾹 참고 다시 닫아 버리는 등, 오로지 거의 먹을 것에만 신경을 써 온 것 같다. (12~13쪽)
조금만 참아 주기 바란다. 곧 결론을 내릴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음식은 본질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먹을 것’은 만족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실체라기보다는 개념이다. 그것은 만족 자체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다이어트가 종교나 정치적 열성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맛에 저항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음식 그 자체로는 보상을 얻을 수 없어서 더 먹는다.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가장 호사스런 경험은 한 입을 먹고 난 후와 다음 한 입을 먹기 전의 경험, 즉 방금 전에 먹은 한 입을 기억하고 곧이어 먹을 또 한 입을 고대하는 일이다. 실제로 먹는 부분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먹는 낙이 그토록 애를 태우는 동시에 그토록 위험한 것이 되는 이유는 이렇듯 계속 갖고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열등한 일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린 동물이다. 사실 식욕은 그보다 부수적인 성욕과 비교했을 때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서 훨씬 더 큰 자극제가 된다. 그렇다면 자원 경쟁에서 뚜렷하게 승리한 사람들, 즉 우리들 가운데 가장 뚱뚱한 사람들은 생물학적 성공 사례들을 높다랗게 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개체 수가 과도하게 불어난 사슴 떼에게 물어보라. 자연은 성공을 벌한다. 만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은, 즉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안전하고 내밀한 은닉처에 도토리를 묻어 두는 행위는 나름대로 분별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진화론적으로 영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조국을 죽이고 있다. 그러니 ‘섭식’이라는 주제를 하찮게 여기면 ‘섭섭’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나도 가끔은 내가 내 나라를 그렇게 걱정하고 있나 싶다. 하지만 내 오빠를 그렇게 걱정하는 건 분명하다. (14쪽)
부당한 건 알지만 나는 10킬로그램 불어난 것이 플레처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호구는 아니었다. 상대가 손가락질을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을러대면 순한 어린 양처럼 말없이 수긍하는 척하다가, 상대가 ‘이제 버릇을 고쳐 놨다’고 생각하고 떠나면 저만치 가서 하지 말라는 짓을 태연하게 다시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반항적인 기질은 플레처가 특정 식품군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곧바로 비난하듯 그것을 간식으로 먹기 시작하면서 역효과를 낳았다. (치즈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치명적이었다. 그다음 날 나는 잘라서 파는 커다란 원형 브리 치즈 반 통을 사 갖고 돌아왔으니까.) 남편이 연애 시절과 신혼 시절에 홀딱 빠졌던 음식들, 이를테면 바나나 크림 파이나 두툼한 수제 피자 등을 더 이상 먹지 않으려 드는 게 내겐 상처가 되었다. 사랑과 음식은 완전히 별개였지만 수백 년 동안 여자들은 그 두 가지를 서로 연관시키는 실수를 저질러 왔다. 나라고 크게 다를 게 있겠는가? 한편으론 요리가 그립기도 했다. 나는 요리가 치유의 효과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이따금씩 코코넛 케이크를 구웠지만 플레처는 먹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들도 아빠의 눈이 무서워 선뜻 먹지 못했다. 어쨌든 누군가는 그 케이크를 먹어야 했다. 내겐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우리는 의례적인 타협안을 도출했다. 나는 금지된 간식거리를 만들 때마다 한 입 크기를 잘라 내어 커다란 도자기 디저트 접시에 담고 약간의 생크림과 박하 잎, 신선한 라즈베리 두 개로 장식한 다음, 반짝거리는 은제 포크를 곁들여 이른바 ‘식욕 도우미’를 마련했다. 그런 다음,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산타를 위해 쿠키를 놓아두듯 그것을 조리대용 아일랜드 식탁 한가운데 놓아두고 사라져 주었다. 플레처는 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미끼를 무는 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이제는 ‘독약’으로 여기는 음식의 ‘무허가 샘플’이 한 시간도 안 되어 사라
져 버리는 것은 내게 말할 수 없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치처럼 엄격한 식이요법을 강요하는 내 남편은 엄밀히 말해 더 멋있어졌지만 나는 예전의 모습이 더 좋았다. 게다가 이제는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이마가 튀어나오고 얼굴은 갸름하고 길었으며, 총알 모양의 두상에다, 대머리를 최소화하려고 머리를 바늘처럼 뾰족뾰족하게 깎았다. 길고 선 굵은 코는 옆에서 보면 체크 부호 같았고, 철테 안경 때문에 대학교수처럼 예리한 이미지가 풍겼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가는 역삼각형 몸매로 바뀌면서 좀 더 엄격하고 비판적인 인상이 강해졌고, 그때문에 나는 그가 옆에 있기만 해도 핀잔을 듣는 기분이었다. (24~25쪽)
“알아봐야지. 내가 오빠의 코치가 될게. 나도 살을 좀 빼야 해. 게다가 오빠나 나나 ‘방법’은 알고 있어. 엄청난 지능이 요구되는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플레처는 어쩌고? 애들은?”
“애들은 계속 왔다 갔다 하면 돼. 하지만 플레처는… 좋아하지 않겠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는 어림도 없을 게 분명했다. 내가 다시 덧붙였다.
“감수할 거야.”
오빠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나는 방금 전에 내가 한 제안에 한편으로는 신이 나고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하룻밤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며칠 밤을 생각해 본 터였다.
“응.”
“맙소사.” 오빠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오빠의 두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이것도 물어봐야겠지. ‘오빠’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줄 거야?”
정확한 등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후회할 게 분명했다.
“와.”
오빠의 입이 벌어졌다. 중대한 일을 고심하는 듯 오빠의 얼굴에 퍼져 가는 그 파장을 보고 나는 안도했다. 그가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받아들이지 않길 바랐다.
“네 남편은 괜찮겠어?”
“좀 놀라겠지.”
“좆나게 난리칠걸. 너랑 나랑 한집에 산다고? 그 자식, 쫓아와서 나를 죽이려 할 거야, 쳇.”
“다행히 우린 총이 없어.”
“그 자식은 내가 뚱뚱한 거에도 열이 받겠지만 그보다 더 열받을 만한 일이 딱 하나 있지.”
그는 단호한 눈을 하고 덧붙였다.
“내가 ‘안’ 뚱뚱해지는 거.”
“날 속이고 몰래 먹는 건 절대 안 돼. 열일곱 살 때 돈 한 푼 없이 연고도 없는 뉴욕으로 간 건 이번 도전에 비하면 우체국에 다녀오는 수준일 거야. 왜냐하면, 무조건 이건 오빠가 지금까지 겪은 일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될 테니까.” (214~215쪽)
미트볼 신의 부드럽고 거대한 품속에 자신을 내던진 일, 그로 인해 직업적인 지위에서부터 마일스 데이비스의 한정판 박스 세트까지 모든 것을 잃은 일, 결국에는 여동생이 부활절 달걀 같은 자신의 똥 덩어리를 줍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퍼를 연 채로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일. 이 모든 것을 통해 그가 한 일은 바로, 알코올 중독 치료의 전제 조건으로 알려진 것, 즉 ‘바닥을 친 것’이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황은 언제든 더 나빠질 수 있다.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눈앞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폭파시켰는데도 다음 날 아침에 살아서 다시 눈을 뜬다는 사실이 혼란스럽고 놀랍고 심지어는 화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너덜너덜했던 가장자리가 그럭저럭 붙어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저주와 축복이 모두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테니까. 에디슨 오빠의 경우에는 이와 더불어, 이미 이름이 있는데도 그동안 ‘또 하나의 이름을 만들어 유명해지려 한 것’이 쓸데없는 짓이었음을, 그것은 (뚱뚱한 존재가 아닌) 소중한 존재의 꼭대기에 겨우 마라스키노 체리 고명을 하나 더 얹은 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314~315쪽)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