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16세기는 이렇듯 천동설을 절대의 진리로 여기는 교회에 관찰과 실험 및 수학의 결합을 통하여 진정한 과학을 발전시키려는 과학자들이 대항하던 시대였으며, 또한 종교개혁의 시대이자 식민지 개척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럽사에서 16세기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16세기의 역사 기록에 빠져 있는 며칠이 있다. 바로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의 기간이다. 당시 유럽의 중심 로마에서는 이 열흘 동안이 기록에서 완전히 빠져 있다. --- p.18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로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답은 간단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아무 일도. 이 열흘 동안 로마에서는 단 한 건의 종교재판도, 마녀 화형식도 없었다. 멀리 중국으로부터 물건을 싣고 들어오는 배도 보이지 않았으며, 매일 열리는 시장도 서지 않았다. 뾰족한 창을 들고 몰려다니면서 행패를 부리는 군인들도 보이지 않았고, 주정뱅이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교회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으며, 학자들의 열띤 토론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때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숨도 쉬지 않았다.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거나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한 명도 남김 없이 죽어 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역사책에는 이 열흘 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일까? --- p.19
1582년 10월의 로마 달력에는 5일부터 14일까지가 빠져 있다. 하지만 이 달력은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다. 또는 못된 폭군이 재미 삼아 백성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달력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이 달력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달력으로, 제대로 된 달력이었다. 어쨌든 이 달력에 따라 사람들은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밤에 잠들어 다음 날인 금요일 10월 15일 아침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 p.20
서양에서는 8월 중 가장 더운 때를 일컬어 ‘개의 날(Hundstage)’이라고 한다. 우리의 복(伏)날과는 묘한 우연인 셈이다. 이때가 되면 여명이 비칠 무렵 그 전에는 볼 수 없는 시리우스 별이 지평선 근처에서 관찰된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별을 소티스(Sothis), 즉 ‘나일 강을 가져오는 이’라고도 불렀다. 이 별은 큰개자리의 일등성으로서, 신화의 주인공 이시스의 별이기도 하다. 이때가 되기 전까지 시리우스는 먼저 떠올라 있는 태양의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이 이동하고 태양과 시리우스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다가 마침내 사람들은 시리우스를 해가 뜨기 전 여명에 볼 수 있게 된다. --- p.63
로마 인들은 윤달을 ‘메르세도니우스(mercedonius)’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윤달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음력 달력의 윤달과는 달리, 하나의 독립된 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2월 중순에 끼어 넣어졌다. 즉 마지막 달인 페브루아리우스 23일 후에 윤달에 해당하는 22일 또는 23일 간을 끼워 넣고서, 이 기간이 모두 지나면 다시 24일부터 28일까지 5일을 더 세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체계가 없는 달력은 다른 어느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로마 공화정 말기의 사회 혼란상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달력을 주관했던 제관들은 윤달의 원칙을 제멋대로 무시하고 1년의 길이를 고무줄 늘리듯 늘였다 줄였다 하기도 하였다. --- p.73
폼페이우스를 무찌른 후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원정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그에 따라 더욱더 큰 권력을 장악하게 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의 개선 행진을 보기 위해 모든 로마 시민들이 도로로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화려한 개선 행진 이면에 가려져 있는 사회적 위험에 대해 주의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위험부터 우선적으로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위험이란 바로 혼란스러운 달력 체계로 인한 사회 질서의 혼란이었다. --- p.80
이후로 로마의 달력 체계는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권력자들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선례를 따라 자신의 이름을 달력에 넣어 보려는 시도나 계속되었을 뿐이다. 제 이름을 따서 달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복잡한 숫자를 가지고 까다롭게 머리를 써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 그러나 권력에 아부는 따라올지 몰라도 업적과 존경심까지 반드시 따라오는 법은 아니어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로마의 제5대 황제로서 폭군의 대명사인 네로(Nero, 재위 54-68)만큼은 4월인 아프릴리우스를 자신의 이름를 따서 네로네우스(neroneus)로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자마자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4월의 본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 pp.88-89
교황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톨릭 국가들에 그레고리우스의 개혁 달력이 보급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1582년 12월 9일에서 바로 20일로 넘어갔으며, 홀란드와 플랑드르에서는 1582년 12월 21일 다음 날이 1583년 1월 1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얼마 전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개신교 국가들은 로마 교황청의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었다. --- p.114
그러나 달력 개혁의 논리적인 이유 같은 것은 상황 개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개신교 지역에서는 율리우스 달력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달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역별로 두 개의 달력이 동시에 사용되자 일상생활과 특히 국제 무역에서 대혼란이 생겼다. 서로 날짜가 달랐기 때문에 개신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은 사회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 p.115
더 심각한 사태는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가 혼재하여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나타났다. 로마의 달력을 따르는 가톨릭 가정에서는 2월에 이미 수난절(受難節)이 시작되었는데, 개신교도들은 성문 앞 광장에 모여 사육제(謝肉祭, 카니발)를 즐기고 있었다. 또 개신교도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금식을 하고 있는데, 가톨릭 교도들은 바로 옆 교회에서 기쁜 마음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거나 들판에 일을 나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런 현상이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 p.116
하지만 새로운 달력을 접하게 된 신문을 비롯한 모든 출판물들은 파쇼 달력과 함께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따른 날짜를 나란히 병기하였다. 그래서 다행히 사람들은 생활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었다. 파쇼 달력만 사용되도록 애썼던 무솔리니의 무수한 노력은 사람들의 비웃음만 샀을 뿐이었다. 파쇼 달력은 1943년 2차 대전 중 파쇼 권력이 무너지면서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파쇼의 시대는 정작 원조(元祖)의 나라에서는 무척 짧았던 것이다. --- p.142
여기에 또 공휴일은 차치하고라도 주말의 수도 매번 다르므로 각 달, 분기별로 근무일의 수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토요일도 쉬는 경우에 주말이 월의 앞과 뒤에 걸쳐 있다면 그달의 근무 일수는 2일 정도 줄어들 수가 있다. 따라서 근무 일수가 많은 경우의 큰 달과 근무 일수가 적은 경우의 작은 달을 비교하면 그 차이는 매우 커진다. 예를 들어 2001년의 2월은 근무 일수가 겨우 20일이지만 같은 해 5월에는 23일이나 있다. 2001년 5월에는 2월보다 근무 일수가 15퍼센트나 많은데, 같은 기본급을 주고 또 받는다면 과연 옳은가.
--- pp.227-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