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산 4-14번지가 내 본적지다. 나는 마치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걸음걸이가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이동한 곳에서 30여 년을 살아왔다. 지금은 잘 구획된 상가와 주택가가 있는 그곳은 내 유년시절에는 시금치 밭이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가난한 가계의 살림을 도맡아야만 했던, 어머니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다(결혼 후에도 아버지는 7년 간을 실업자로 보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린 하얀 미소, 그것은 유년시절의 몇 안되는 행복한 추억의 스냅사진이다.
내 유년시절은 도시영세민의 어둡고 우울한 표정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라기보다는, 무한대의 향유가 가능한 놀이터로 보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삼익 세라믹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옛 동네의 야산에는, 깨밭과 콩밭 같은 당시의 배고프고 영악스러운 아이들에게 주된 약탈지(?)가 되어야만 했던 놀이터가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풀 포기를 이리저리 비틀어서 반지와 왕관을 만들었고, 사내아이들은 차돌과 연탄재를 던지며 싸움판을 벌였다. 이상한 것은 그 작은 동네의 아이들의 유난히도 호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부모들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순진성의 반영이었다. 영세민이어야 했던 부모들은 그악스럽게 싸우고 밥상을 발로 걷어차고 집을 나가기 일쑤였고, 아이들은 두려움과 울먹임 속에서도 서서히 그것에 익숙해져 갔다.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은 두렵지만 비밀스러운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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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의 실존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판적 지식인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모순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기를 꿈꾸는 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제도와의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심해질 때, 그는 제도로부터의 축출까지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서울대 김민수 교수와 서강대 이정우 교수의 경우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비판적 지식인은 제도의 내부에서 싸우면서, 제도의 외부와의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 학문의 내부에서 싸우면서, 학문의 외부까지를 응시하는 넓은 시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때로 자신이 제도적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도, 자신의 이후 세대들이 그 희생을 통해 보다 바람직한 조건과 토대 속에서,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을 상황을 구조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