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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히로시마

나의 히로시마

: 공생의 길, 평화의 길

이실근 저 / 양동숙,여강명 공역 | 논형 | 2014년 09월 0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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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9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152*225*20mm
ISBN13 9788963571614
ISBN10 896357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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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실근
1929년 6월 22일 야마구치현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출생. 1945년 8월 7일 귀가 도중 히로시마시에서 입시피폭. ‘재일본조선인피폭자 연락협의회’ 회장, ‘히로시마현조선인피폭자협의회’ 회장. 현재 히로시마시에 거주. 주요 논저로 [白いチョゴリの被爆者](1979), [アンニョンハシムニカ李さん](1990), [Pride(プライド): 共生への道 私と?島](2006) 등이 있다.
역자 : 양동숙
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오사카대학 인간과학연구과 외국인초빙연구원으로 재직 중. 히로시마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인 원폭피해자 관련 연구 상황과 이실근(히로시마현조선인피폭자협의회) 소장 자료?(Japan) 등이 있으며,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읽는다](공저, 2010), [히로시마만의 군사화와 성폭력](역저, 2013) 등이 있다.
역자 : 여강명
일본 히로시마현 출생.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민족학교를 다녔고, 조선대학교(東京)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이바라기(茨城) 조선초중고급학교와 히로시마 조선초중고급학교에서 교원으로 모국어를 가르쳤다. 교원 재직 시 모국어로 시를 창작, 발표 했다. 한국에서 출간된 가와즈 기요에(河津聖?)의 시집, [학교 가는 언덕길](2011)의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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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 산기치(山村三吉) 전(殿), 귀전(貴殿)
이 전투기 한 대를 헌납해주셔서,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야마구치현 지사(知事) 사사키 요시토(佐?木芳遠)’

너무 훌륭하고 환한 감사장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감사장에 등을 돌린 채, 맥없이 앉아 있었다.
“결국 숯을 구워도 구워도,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단 말이다. 이 따위 것들 때문에….”
그렇게 조선어로 중얼거리던 아버지.
그 등이 당시는 생각지 못했던 아버지의 깊은 서글픔이라 생각하니 지금 내 가슴이 에인다. 아버지는 그 후 동쪽 벽을 향해 예를 표해 절하지 않았다.
당시 돈으로 전투기 한 대가 8만 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8천 만 엔 정도 될까. 아버지가 회장을 맡은 4개 마을 협화회의 수천 명의 조선인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해서, 겨우 얻은 거라곤 이 감사장 한 장이었으니, 아버지의 어쩔수 없는 분함, 허무함이야 오죽했을까. 그때 나는 어려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쓰러진 때는 감사장을 받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시 귀국한 조선에서 급성 폐렴에 걸려, 관부연락선(?釜連絡船)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 후 입퇴원을 거듭하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66년 7월 사망했다. 나이 73세였다. 조국의 땅을 더는 밟지 못하고….---「1장_ 아버지의 등」중에서

때마침 쌀을 팔러 고베로 향한 날이 8월 5일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사 역에서 밤 7시 지나 열차를 탔다. 그날은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나, 그 외 사람을 모두 합쳐 9명으로 팀을 구성했다. 오고리(小郡), 이와쿠니(岩?), 히로시마(?島), 오카야마(岡山)를 통과해서 6일 아침 7시를 지나 산노미야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하루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오전 8시 15분.
미군 B29 ‘에노라게이(エノラゲイ)’가 히로시마에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를 투하했다. 원폭은 오타가와(大田川) 강가, 당시 히로시마 산업진흥의 상징처럼 서 있던 아담한 산업장려회관(産業???館)(현재 원폭돔) 상공 580m에서 폭발했다.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죽음의 거리로 변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암거래 쌀을 다 팔고, 저녁까지 휴식을 취하고 언제나처럼 산노미야 역에서 오후 7시가 지나 열차에 올라탔다. … 내 눈에 비친 광경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도 창백해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제까지 열차로 몇 번이고 지나가던 히로시마. 서일본 최대 도시 히로시마. 5일 밤, 그곳을 열차로 지나갈 때는 확실히 살아 있었던 히로시마의 거리. 그 전부가 새까맣게 타버리고 없어졌다. 완전히 죽음의 거리, 페허로 변해버렸다. 코가 마비될 듯한 구린내가 주변을 에워쌌다. … 우리 아홉 명은 공포심으로 여럿이 손을 잡고 걸었다. 나는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손춘식(孫春植, 일본명은 松本)과 함께 했다. 선두를 걸었던 손춘식은 느닷없이 무엇인가를 밟아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탓에 함께 벌렁 나자빠진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물체를 보고 ‘캬-!’하고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내 밑에 전신이 타버린 사람이 있었다. 고무신을 신은 손춘식은 전신 화상을 입고 쓰러진 피폭자를 밟아 넘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목숨이 끊어진 피폭자 위로 겹치듯이 쓰러진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굳어져 잠시 까딱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방화용수가 있던 장소인 듯 했다. 피폭자가 물을 구하러 도착해 몇 명에서 몇십 명이 폭발로 누워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일어난 나는 떨리는 다리를 끌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여름의 태양이 반짝반짝 비치는 지면에서는 코를 찌르는 듯한 송장 썩는 악취와 부패한 냄새만이 올라올 뿐이었다. 격심한 구토가 덮쳐왔고, 공포심과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걸었다. 함께 가는 동료의 얼굴은 하얀 분을 바른 죽은 시체처럼 새파래졌고 눈은 초점이 없었으며, 소리도 안나왔다. 어쨌든 일찍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본능처럼 그저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1장_ 죽음의 거리_히로시마를 걷다」중에서

1945년 10월경부터 재일조선인의 빼앗긴 민족의 말, 문자, 역사, 전통문화를 되찾자는 ‘국어강습소’가 우리 마을에도 생겼다. 재일조직인 ‘조선인연맹’도 건설되고, 청년부도 활동을 시작했다. 차별로 학교도 못 가고 조선인 대부분이 문자를 읽지 못하는 시대였기에 중퇴라해도 구제(?制) 중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 나는 귀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나 자신은 사상도 애매하고 명확한 민족의식 조차도 지니지 않았다. … 그럴 즈음, 같은 마을에 사는 규슈제국대학(九州帝?大?)의 이마나카 즈구마로(今中次磨) 선생의 문하생에게서 도서관에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곳은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젊은이들이 모여 학습회를 하는 장소였다. 너무 매일 권유를 해와서 따라가 봤는데, 처음에는 하는 말이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로 들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참석하다 보니 점점 의미가 이해 가능해졌다. 듣는 습관이 생기자 신기하게도 배우는 재미가 생겼다. ??변증법적유물론??, ??사적유물론??, ??맑스자본론??, 그런 내용을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미망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 안에서 혼돈스러웠던 뭔가가 배움으로 정리되는 듯싶었다.
더욱더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한편 ‘국어강습소’도 다니고 조선어도 배웠다. 그런 식으로 조선의 조직 안에서 지내면서 점점 본래 조선인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2년이 흘렀다. 48년 초, 조선인연맹에게서 도쿄(東京)로 가서 공부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나도 자립의 한걸음을 내딛을 날이 왔다. 참 좋아했던 할머니와 애지중지 키워주신 부모님의 곁을 떠나 상경했다. 열여덟 살의 봄이었다.---「2장_배우다」중에서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발발했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의 한국_대전에 주둔하던 미 육군 제24단 약 3만 명의 사단장인 딘(William Frishe Dean) 소장은 북한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 미국의 전쟁은 부정의(不正義)한 전쟁이다. 타국에 대한 침략전쟁이다.’
성명문이 평양방송 등의 미디어를 통해 일본에도 들어왔다. 짧은 방송 내용은 나를 흥분시켰다. 나는 몇 명의 동료와 함께 본래 지닌 ‘정의감’에서 성명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등사판을 찍어 수백 장의 삐라도 인쇄했다.
‘미국의 전쟁은 부정의였다. 전쟁을 위해 공산당을 지하로 몰아넣고 우리 조선인연맹을 해산했다. 미국은 나쁜 놈이다. 딘 소장도 그렇게 고백했다.’
그리고 만든 삐라를 거리의 영화관에서 뿌렸다.
한 달쯤 아는 사람 집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을 때 마침내 붙잡혔다. 그러나 지원자들이 당시 돈으로는 고액인 십만 엔의 보석금을 모아줘서 한 번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다음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고쿠라(小倉) 미군 제24사단 헌병사령부 내 군사법정에서 미국이 재판한다고 했다. 재판이라 해도 심의 등도 없이, 저쪽이 일방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삐라 한 장 뿌려도 징역 10~15년이라는 장기형을 내리는 시대였다. 출정(出廷) 명령이 떨어진 군사재판을 거부하고 다시 나의 도망생활이 시작되었다.---「2장_도망생활」중에서

1959년 1월 22일, 영화관에서 삐라를 뿌리고 도망생활에 들어가, 그 후 체포되어 햇수로 8년째, 나는 겨우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날 단 한 명인 나를 맞이하기 위해 히로시마 요시지마(吉島) 형무소 정문 앞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출소가 결정되고 나서는 조선어로도 인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 미리 준비했다. 매우 능숙한 조선어 통달자는 아니었지만, 글자를 외우거나, 이제까지 알았던 조선어를 정리해, 그럭저럭 조선어로 인사했다. 일본 지원자도 많이 와줘서, 일본어로도 인사했다.
“동지 석방 만세!”
형무소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애국자가 돌아왔다고 선전문을 돌렸다. 내빈 인사도 있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하나가 되어, 영접해줬다. 모두가 환호성을 울리며, 화답해줬다. 8년이라는 긴 시간, 축적된 괴로움, 고통, 서운함, 그것뿐만 아니라 이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서 돌아왔다는 해방감, 여러 가지 생각이 몸속에서 바깥으로 분출되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 못하는 강한 감동이었다.---「3장 _출옥」중에서

8년간의 옥살이에서 풀려나 히로시마에서 합법활동이 가능해졌어도 역시 1945년 8월 7일 입시피폭의 체험은 나의 뇌리에서 항상 떠나지 않고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혹독한 옥중생활이었지만, 만일 살아서 출옥하는 날이 온다면, 무엇보다 진정으로 우선 피폭자의 조직을 건설하고야 말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출옥 후 곧 오노미치에 파견되거나 북한으로 귀환하는 재일동포 귀국사업 등으로 몹시 분주했다. 침착하게 조직을 꾸릴 여유도 없었다. 조직결성을 위해 결국 본격적으로 조직사업을 시작한 시점은 전후 30년이 지난 1975년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본인 피폭자 조직은 이미 1956년에 결성되었다. 원수금운동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원폭피해자운동 안에서 제창된 ‘일본인 유일피폭자(日本人が唯一の被爆者)’론의 영향도 있어서, 우리 재일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존재감은 미미했고, 사실상 ‘골짜기의 피폭자(谷間の被爆者)’로 세간으로부터 망각되었다. … 1975년 8월 2일, 현 내 조선인 피폭자 130명이 히로시마시 사회복지센터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해, 조선인을 포함하는 원호법 제정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채택하며 내외에 강력히 호소했다. … 유일피폭국, 유일피폭자론이 전개되던 시기에 ‘유일피폭국’은 옳더라도 ‘유일피폭자론’은 잘못된 인식이라 주장하며 탄생된 ‘조선피폭자협의회(朝鮮被爆者協議?)’. 조피협의 결성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녔다. 일본인 만이 유일한 피해자가 아니다. 죄가 없는데도 피폭된 수많은 조선인. 그 조선인이 힘차게 일어섰다는 사실을 세계를 향해 선언한 것이다. 75년 8월 결성으로부터 77년까지 일본의 청년과 학생들의 협력을 얻어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실태를 조사했다. 그 해 6월에는 히로시마에서 열린 NGO의 피폭문제 국제심포지엄에서 재일조선인 피폭자의 비참한 생활과 실태를 널리 세계에 호소했는데, 그 일이 매스컴에 오르내려 큰 반향을 불렀다. 그것을 기회로 일본 국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열심히 활동했다. 80년대는 유럽, 미국까지 모두 돌았다. 80~84년 구미지역의 고조되던 반핵운동의 열기 한가운데, 일본 평화운동의 멤버로 구미 각국을 돌았다. 89년 처음으로 북한도 방문했다.
78년 제1회 유엔 군축총회가 뉴욕에서 개최되어, 일본에서 500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 나는 히로시마현 조선인피폭자협의회의 부회장인 백창기(白昌基)와 함께 처음으로 조선적인 채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성공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이듬해인 1979년에 책 한 권을 간행했다. ??하얀 저고리의 피폭자(白いチョゴリの被爆者)??라는 제목의 책으로 조선인 피폭자의 삶에 대한 증언집이었다. 나는 조선피폭자협의회를 세웠을 때, 언젠가 우리의 진실한 외침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일본인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4장_하얀 저고리의 피폭자 간행」중에서

내가 걸어온 재일 반 세기의 활동에서 ‘공생을 향한 첫걸음’으로 규정하는 사건은 ‘고보댐 추모비(高暮ダ?追悼碑)’ 건설이다. 고보댐은 히로시마 현 북부, 현재 쇼바라시 고야쵸(庄原市 高野町)를 흐르는 가미노세키가와(神野?川) 상류에, 전시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건설된 댐이다. 1939년 수렁에 빠져들던 중일전쟁의 한 가운데서, 전력 부족의 해소를 위해 국책에 따라 고보댐 건설계획이 시작되었다. ‘전쟁 승리를 위해’, ‘국가를 위해’에 반대하는 자는 가차없이 ‘비국민’의 낙인을 찍어 강제로 계획을 진행했다. 게다가 댐 공사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1940년(昭和 15년)부터 무고한 2천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 연행되었다. 그들은 당시 15세에서 25세 정도로 아직 청소년들이었다. 행선지도 알리지 못한 채 한반도에서 끌려와, 시모노세키(下?)부터 미요시(三次)까지는 기차로, 미요시 역부터는 천막트럭으로 산기슭까지 실려왔다. 그곳에서 현장까지는 밧줄로 줄줄이 묶여 연행되었다. … 현지 필드워크를 통해 이런 귀중한 사실을 알면서부터 뭔가 그것을 형상화해, 물질로 남겨 전하고 싶다는 강한 생각이 샘솟았다. 그래서 미요시 지방사 연구자인 후지무라 고이치(藤村耕市) 선생과 상담을 통해, 첫째, 1989년 7월 ??전시하 히로시마현 고보댐 조선인 강제노동의 기록(戰時卞疼島?高暮ダムにおける朝鮮人?制??の記錄)??을 출판, 둘째, 1993년 ‘고보댐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건립 운동’을 시작해, 95년 7월 추모비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누가 뭐라 해도 당시의 고보쵸의 다나카 고로(田中五?) 정장이나 기미타무라의 후지와라 기요타카(藤原?隆) 촌장을 비롯한 현지 주민, 그에 종교, 문화, 교육 관계자 및 초중고 학생들까지 폭넓게 참여해 우리 조선인과 함께 운동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모금활동은 그날 저녁 쥬고쿠방송(中?放送)과 히로시마TV에 방송되었다. 학생들 모두 기분 좋아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고보쵸와 기미타무라의 현지 주민은 물론, 널리 히로시마 시내에서도 후원금을 받아, 마침내 목표액 500만 엔 가까운 모금이 모였다. 우리는 비석을 한반도에서 들여왔다. 비의 명칭도 일본어와 조선어를 병기했다. 그리고 1995년 7월 13일, 성대한 제막식을 가졌다. 그날 참가한 조선과 일본의 두 학생들을 중심으로 참가자 전원이 둑 위에 올라가 아리랑을 합창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손을 맞잡고 활동해, 하나가 된 공생을 향한 새로운 첫걸음이었다.
이런 비참한 과거의 역사 사실은 북쪽의 홋카이도(北海道)로부터 남쪽의 남방제도(南方諸島, 옛 일본군 기지)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존재하지만, 대부분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 중에는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그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젊은 세대에게 이런 일본의 과거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고 덮어둔 채로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행동의 중요성을 배운 이 ‘고보댐 조선인 추모비’ 활동이 바로 공생을 향한 길이라 확신한다.---「4장_공생을 향한 발걸음」중에서

피폭으로부터 60년, 한일협정으로부터 40년, 무라야마(村山) 전 수상의 50년 담화로부터 10년이 경과했다. 또한 ‘무엇이 변하지 않고 있는가’를 냉정히 되묻고 싶은 생각이다.
한반도는 저 비극의 혼란에서 60년이 지난 지금, 쌍방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확실히 변하려 하고 있다. 한편, 일본을 보면, 최근 수상한 분위기가 한 발 한 발 자욱하게 엄습해온다고밖에 생각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역사를 모르는 정치가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칙어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교육기본법의 개정,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다시 양성하려는 헌법 9조의 개정, 게다가 핵무기를 지니려는 움직임까지 갈수록 노골적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당시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일전쟁을 치룬 군부는 전쟁을 대일본제국의 자존자위와 구미 제국의 지배에서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정의의 전쟁으로 생각했다. 그 정의를 위해 싸운 영령에 합장하는 일이 왜 안되는가라는 생각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는 근저에 깔려있다. 그러나 전쟁에 정의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1975년 내가 ‘조선피폭자협회’를 만든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1977년 당시 후지타 마사아키(藤田正明) 총무장관으로 시작해, 2005년 8월까지 21명의 관계 각 대신과 9명의 총리대신에게 요청해 온 재조피폭자 지원조치는 지금도 ‘검토 중’이다. 일본정부의 ‘검토’란 28년이 걸려도 결론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가? 조피협 멤버도 이제는 꽤 줄었다. 처음에는 130명으로 출발, 한때는 540명까지 늘어났지만, 북한으로 귀국한 자, 사망한 자도 많아, 지금은 300명을 밑돌지 않을까. 단 일본에 사는 조선_한국인 피폭자를 모두 포함하면 4,200명 정도 된다. 그 중 약 1,500명이 히로시마현에 살며, 대부분 히로시마 시내에 산다. 아직 상당수의 피폭자가 남아 있다.
지금 다시 30년을 회고해보면, 내가 걸어온 길은 피폭자 문제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모든 게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 몇 번이나 좌절했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난관을 넘어, 하려고 마음먹은 일을 성취해 온 날을 생각하면, ‘그때 피폭자 조직을 만들길 잘 했다’란 감회가 절실히 든다. 후회는 없다. 틀리지 않았다. 그런 자부심과 프라이드가 지금 내게 하나의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만약 그때 피폭자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면, ‘조선인에게도 피폭자가 있다’는 역사적 사실 조차 세상에 인지되지 않았을 테고, 반전_반핵 평화운동의 대열에 동참은 물론 북한 거주 피폭자 문제는 틀림없이 알려지지 않았을 테다
---「에필로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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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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