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배두나 방 조명을 미리 다 세팅해놓고 나와서 놀았다. 남자 스태프들은 현장에 못 있게 하니까 하루종일 밖에 나가 족구만 했다. 맨날 정사 신만 찍으면 좋겠다.
- 문형준(조명부)
9월 18일
두나 전기고문하는 장면을 찍다. 전기 잘 통하라고 귀에 침을 살짝 묻히는 장면을 찍는데 두나가 아주 몸부림을 치고 온통 난리를 부렸다. 어떤 테이크 때는 진짜 못 참겠는지,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잠깐만!" 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하도 치를 떨며 말을 해서 그런지 발음까지 분명치 않았다. 당연히 감독님은 거기서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고, 아마도 그 테이크를 편집에 사용할 것이다. 실감나니까. 그렇지만 나는 몹시 기분이 언잖았다. 두나는, 제 귀에 내 혀가 닿는 게 그렇게도 싫었을까?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그거...
- 송강호(배우)
9월 19일
그에게 점점 다가가는 자신을 느끼기 시작한다.
- 배두나(배우)
9월 19일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전기충격으로 기절한 내가 강호 형한테 무방비로 구타당하는 장면. 무식하게 풀숏/롱테이크로 콘티를 짜놓은 감독님이나 진짜로 사정없이 때릴 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강호 형이나, 정말이지 남 생각 진짜 안해주는 인간들이다. 무슨 애도 아니고, 나도 액션 장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냥 가만 누운 채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어야 한다는 상황은 좀 다르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건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작 맞을 때보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기다리는 그 침묵과 암흑의 순간이야말로 진짜로 무서운 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그 송강호라는 명배우는 리허설 때 다르고 실제 촬영 때 다르고, 촬영 때도 매 테이크마다 다르게 연기하기로 유명하신 그분 아닌가. 이건 예상도 안되고.... 미치겠다.
- 신하균(배우)
9월 20일
티저 포스터 촬영 빵꾸나다. 스튜디오에 나타난 하균 씨 얼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온통 멍들고 군데군데 찢어지고 이건 아주 난리가 아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랬더니 어제 촬영하다가 강호 씨한테 맞아가지고 그랬다고 한다. 영화도 좋지만 어떻게 애를 그렇게 만드나...
- 이재용(포스터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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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피
빨갱이로 낙인 찍혀 쫓겨난 줄스 다씬, 누아르의 꽃을 빠리에서 피우다. 한마디 대사 없이 계속되는 보석상 털이 시퀀스. 관객은 그게 다 끝나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30분 만에.
키스 미 데들리
비열하고 무자비하고 뻔뻔스러운 탐정, 가장 마이크 해머답게 묘사된 마이크 해머.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로 표현된 흑백 화면은 냉전시대의 풍경 그 자체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김기영, 꼭 그때 태어나야 했다면 프랑스나 스페인을 고르든가, 그래도 악착같이 한국이어야 했다면 한 40년 늦게 나오든가.
테레즈와 이사벨
플랑드르 회화의 '나른한 정적' 전통 속에 담긴 전복적 담론. 알렝 레네가 동성애에 관심 있었다면, 또는 데이비드 해밀턴이 천재였다면 만들었을 법한 영화. B급 저패니메이션의 소녀학원물 같기도 하고.
드릴러 킬러
감독 자신이 연기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뉴욕 밤하늘에 구멍을 뚫는 전기 드릴의 금속성 소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대를 늦추지 않고 있는 각본, 촬영, 음악의 동지들.
동경 방랑자
가장 순수한 스즈키의 세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아직 예술가적 자의식이 장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능가하고 있지 않았던 시절의 활동사진적 쾌감.
다크 스타
이 단편을 본 할리우드 배급업자는 USC 영화과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몇 분 더 찍어오면 극장에 붙여주지." 존 카펜터와 댄 오배넌이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해결사
이두용은 하루빨리 재발견되어야 한다. 아트 필름 <피막>, 대작 <최후의 증인>도 좋지만 이 영화의 하드보일드 정서야말로 이두용의 진수다. 젊은 시절의 월터 힐을 연상케 하는 파괴력.
블랙 선데이
촬영기사였던 바바의 감독 데뷔작. 바바라 스틸, 컬트 여신으로 즉위하다. 전통적인 고딕적 공포의 세계를 가장 잘 다룬 이탈리아제 표현주의.
인트루더
코먼에게는 다른 걸작들이 있지만,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워하니 이것을 골라줄 수밖에. 윌리엄 샤트너의 연기만큼은 아마 코먼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최고 수준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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