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이 책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 책에서 나의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내가 썼는데도 내 것이 아닌, 이제는 쓸 수도 없고 써서는 안 될 어떤 것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당신은 홀몸이라는 지도에 그려 넣지 못한 어느 객지이고, 나는 당신을 헤매고 있습니다. --- p.6
몸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자아自我와 타자他者는 움직임으로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 경계를 잃으면서 거울을 얻는다. 나의 거울 ‘너’와 너의 거울 ‘나’를 일치시키는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진다는 것은 숙연한 욕망인 바, 움직이는 자여, 부디 함부로 소모하지는 말아라. --- p.43
훔쳐보고 고문받는다. 내가 본다는 것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임을 알고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시선의 중독성이 이리도 무섭다. 자살은 하려도 해도 되지를 않으니 자해라도 하려는 것이다. 이 도저한 자학의 욕망은 전부 저주받은 피 때문이다. 피가 시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 없다. --- p.124
저 편지도 이미 낡아 바스러지는 낙엽이고, 고백도 오랫동안 삭아 허공이 된 무음일 뿐. 내 곁에는 반려로서의 타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윤곽만이 존재할 뿐이다. --- p.155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 한 마리 노닐지 않는 폐허에는 허물어진 돌들과 쓰러진 풀꽃들이 적막을 치장해 주고 있었다.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고여 있는 얕은 물웅덩이. 나직한 바람만 울음처럼 울어 댈 뿐이었다. 나는 맨발로 흙을 비비고 서서 허공을 누렸다. 바람 소리는 흡사 장송곡과 닮아 있었다. 울음을 참으면서 장송곡을 부르는 여자처럼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 --- p.224
예컨대 이별이란 이런 것이다. 나의 삶을 살던 당신과 당신의 삶을 살던 나에게 각자 서로의 삶을 돌려주는 것. 서로를 빌려줘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혹여 형언하지는 못할지언정 마음으로라도 속삭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설레는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