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긴 오 씨가 교수대의 밧줄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동안 집행 참여자들은 사형장 건물 바깥 느티나무 밑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다.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참여 검사에게 물었다.
“영감님, 오판 아닙니까?”
검사는 교무계장에게 “억울하다고 죽는 사형수가 많습니까?” 하고 물었다.
계장은 “아니오, 나로선 처음입니다”고 했다.
보안과장이 “상담할 때도 그랬어?” 하고 다시 물었다.
계장은 “그걸 모르셨어요? 오휘웅이는 안 죽인 것 같아요“ 라고 했다.
검사는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더라고 한다.]
이 순간엔 그 어떤 인간도 밧줄을 끊을 수 없다. 사형을 선고한 판사조차도. 제도가 구르면 멈출 수 없는 시간대가 있는 것이다.
--- p.15
끔찍한 살인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 存置論者(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 p.22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오 씨가 왜 좀 대차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느냐고 짜증을 부리는 것은, 16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주로 경찰서 출입을 했고, 한 번도 경찰이 두렵다는 것을 실감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의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학교 중퇴의 학력에 수도검침원이란 직업을 가진 한 서민이 경찰, 검찰, 법원이란 막강한 조직과 부딪쳤을 때 느꼈을 공포감과 무력감을 모르고 내뱉는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 p.197~198
필자에게는 지리멸렬의 극치로 보이는 이 말들이 오 씨에게 사형을 안겨줄 만큼 힘이 있었던 것은, 재판부가 그 말들을 ‘믿기로 했다는 점’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든지, 그것은 오 씨의 신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지만, 판사가 어느 쪽 말을 믿는가에 따라서는 인간의 생명이 죽고 산다.
--- p.213,
자백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그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고,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가에 대한 놀라운 무관심은, 상고심이 아무리 서류만으로의 판단이라 해도,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결핍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을 것 같다.
--- p.266
오휘웅 씨 사건을 판단하는 상징적 낱말은 증언과 자백, 그리고 고문과 위증이다. 사형을 선고한 쪽의 논리는 공판정에 검찰 측이 증거로 제시한 증언과 자백이 신빙성 있다는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주장은 고문과 위증에 의한 증언과 자백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문, 증언, 자백은 이 사건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길잡이 구실을 하는 세 낱말이다. 이것은 또 한국 경찰 및 검찰의 수사 풍토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 p.342
한 인간의 주관적 확신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재판의 본질은 중세 암흑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것은 그 확신에 도달하는 절차를, 현대에서는 형사소송법으로 엄격히 규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송절차야말로 인간이 오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수많은 누명 썼던 사람들의 한과 피가 스며있는, 지혜의 보따리다. 고문, 국가권력의 전횡, 재량권의 남용으로 이 절차가 무시된다면, 아무리 20세기에 이뤄지는 재판이라도 그 본질은 중세 암흑기의 재판과 같아지고 만다.
--- p.428
이렇게 절박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토해내는 絶句(절구)가 있다.
“하느님만은 아십니다.”
하느님이 아신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에 영향을 줄 뿐이지, 육신의 구원엔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취재가 잘 안 풀려 답답해질 때마다, 가장 완벽한 증거인멸은 사형집행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했다. “오 씨가 살아있다면 이 대목의 이 의문점을 풀어줄 텐데…”하고 안타까워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 씨는 그의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생각해 보면, 한 인간이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무고함을 증거할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형장에서 진실이 드러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시화 씨와 그의 두 아이들, 그리고 오휘웅 씨의 명복을 빈다.
--- p.431~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