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전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수선사, 백련사,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봉암사, 월명암, 수도암, 정혜사, 칠불사,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조계총림 유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송광사 주지와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등 역임하였다. 송광사 주지 재임 때에는 조계종 교구본사 중 최초로 종무행정 전산화, 재정의 공개·투명화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역저서로 『선에서 본 반야심경』(개정판 2008, 불광출판사)과 『너는 또 다른 나』(2009, 불광출판사)가 있다. 현재 송광사 광원암에서 진각국사 원조탑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정진하고 있다.
반야는 범어로 ‘모든 현상의 실상을 바로 꿰뚫어 보는 지혜’를 의미하는 프라즈냐를 음역한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을 전개하는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고 대승경전의 바탕이 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내용이 연기의 법칙이라는 통찰, 즉 지혜, 범어로 프라즈냐인 것이다. 불교는 알 수 없는 신을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그 깨달음 즉 지혜가 반야바라밀이며 연기의 법칙이며 공의 원리인 것이다. 12연기의 제일 처음에서도 밝히듯이 무명, 즉 근본적인 무지 때문에,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고통스런 윤회가 시작된 것이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고통을 끝내고 적정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 부처님께서 연기의 법칙이라는 지혜를 깨달으신 것이다. --- p.51
연기는 서로 의존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하며 서로 의존하는 상의성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는 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연기의 원리에 의해 존재하는 제법이 공(空)하다는 것은 제법에 대한 직관이며, 이 직관을 ‘반야’라고 부른다. 제법이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해 조건 따라 만법이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공은 연기에 의해 만법을 펼칠 수 있는 열려 있는 무한 가능성이다. 만법이 펼쳐지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연기적인 공의 이치를 깨달아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실천하는 삶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인 것이다. --- pp.73-74
어떤 사람이 그림자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온갖 몸짓을 하며 갖가지 그림자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별별 행동을 다 해보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그림자는 그가 가는 곳마다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어디서 몰래 남의 과일을 따먹으려고 해도 그림자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림자는 그가 남몰래 하는 행동도 모두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 나쁜 일도 그림자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림자에게 몽땅 들키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를 떼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가 동쪽으로 가면 그림자도 동쪽으로 따라왔다. 그가 서쪽으로 가면 그림자도 서쪽으로 따라왔다. 그가 어디로 가든 그림자도 그에게 딱 달라붙어서 어김없이 따라왔다. 천천히 가도 그림자가 따라오고 숨이 턱에 차도록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따라왔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 그림자도 함께 걸음을 떼어 옮겼다. 아무리 도망쳐도 그림자는 끝없이 따라왔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 주저앉아 쉬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한숨을 돌린 그가 문득 그림자를 찾아보았는데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 미움이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그림자보다 더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는 것이다. 우리는 나고 죽음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떨쳐버리려고 한다. 나고 죽음도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음과 양, 빛과 어두움, 원인과 결과로 만들어진 상대적인 관계의 소산이다. 모든 것을 쉬게 하는 나무 그늘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상대성이 없어진 경지이다. 그러한 곳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쉬고 있으면 그림자도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사라진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위해 살면 그림자의 노예가 되어 불안과 공포 등 온갖 스트레스가 생긴다. 마음이 쉬고 고요한 가운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림자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그야말로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지울 수 없다. 아니 지울 필요가 없다. 다만 그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그냥 깨닫기만 하면 된다. 오온이 본래 공(空)한 줄 조견하면, 나의 그림자가 없어지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의 수·상·행·식도 사라진다. --- pp.109-111
하루는 은사스님이 창밑에서 「법화경」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신찬이 보니 은사스님은 「법화경」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읽는 것 같았다. 신찬은 혼잣말로 또 중얼거렸다.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이 나를 읽게 되고, 마음을 깨달으면 내가 「법화경」을 읽게 된다.” 은사스님은 신찬이 하는 말은 들었지만 그 뜻을 몰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방에 벌이 한 마리 들어왔는데 열린 문틈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창호지에만 부딪히면서 왱왱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신찬이 게송으로 읊었다.
열려 있는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창문만 두드리니 어리석기 짝이 없네. 백 년 동안 옛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본들 어느 때 생사를 벗어날 수 있으리오.
경전을 보면서 진정한 반야인 공문의 미묘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종이 위의 글자만 더듬고 있다가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 pp.145-146
주문의 전체 뜻은 모든 고액이 사라진 ‘파라다이스’의 세상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은 오직 깨달음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하고 수행하여 모두가 니르바나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은 깨달음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인 오온은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이 모두 공한 줄을 철저히 사무치도록 조견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주는 바로 『반야심경』의 첫 구절인 “오온이 모두 공한 줄을 깨달아 일체 고액을 건너간다.”를 노래한 것이다. 연기되는 현상 속에서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는 것은 그 현상의 실상이 공한 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오온이 공한 줄 철저히 조견하는 그것이 바로 일체 고액을 소멸하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그 찰나에 모든 선악과 시비의 악몽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고액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 인류의 고통 나아가 세상의 환경이나 대자연의 재액까지 모두 포함한 일체 고액을 건너려면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아서 그 돈오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모두를 원만히 성취시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