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1958년 사이 출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의하면 서울대를 졸업하고 탄허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고 한다. 1962년~1963년 사이 1년간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20여리 떨어진 토굴에서 수행했고 이때의 기록이 《대한불교》에 연재된 적이 있다. 1975년 입적했다는 진술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림 : 견동한
1978년 경기 평택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는 만화를 전공했다. <2008 불교 디지털콘텐츠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국민은행 홈페이지, 서울시의회보 등에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각종 단행본과 참고서의 표지 및 내지에 일러스트와 만화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선객은 모름지기 ‘삼부족 (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식부족 (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추태는 갖가지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되는데 욕망에서 해방은 되지 못했으나 외면만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세속의 70 노파가 산문(山門)의 홍안납자(紅顔衲子)에게 먼저 합장하고 고개 숙이는가 보다.
그러나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 낼 뿐더러 생사문제까지 의탁해 버린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大欲)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面劈佛)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膏血)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선객의 운명」 중에서
결핵에 신음하던 스님이 바랑을 챙겼다. 몸이 약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선방에서 배기던 스님이다. 어제저녁부터 각혈이 시작되었다. 부득이 떠나야만 한다. 결핵은 전염병이고 선방은 대중처소이기 때문이다. 각혈을 하면서도 표정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40대의 스님이어서 의지할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면서도 절망이나 고뇌를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한 체념뿐이다.
뒷방 조실스님의 제의로 모금(募金)이 행해졌다. 선객들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결핵과 함께 떠나는 스님이 평소에 대중에게 보여준 인상이 극히 좋아서 대중스님들은 바랑 속을 뒤지고 호주머니를 털어 비상금을 몽땅 내놓았다. 모으니 9,850원이다. 사중(寺中)에서 오천 원을 내놓았고 시계를 차고 있던 스님 두 분이 시계를 풀어 놓았다. 나는 마침 내복이 여벌이 있어서 떠나는 스님의 바랑 속에 넣어 주었다. 결핵요양소로 가기에는 너무 적은 돈이며, 장기치료를 요하는 병인데 병원에 입원할 수도 없는 돈이다. 응급치료나 받을 수밖에 없는 돈이다. 모금해 준 성의에는 감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에는 죄송스러워 용서를 바랄 뿐이라면서 바랑을 걸머졌다.
눈 속에 트인 외가닥 길을 따라 콜록거리면서 떠나갔다. 그 길은 마치 세월 같은 길이어서 다시 돌아옴이 없는 길 같기도 하고 명부(冥府)의 길로 통하는 길 같기도 하다. 인생하처래 인생하처거(人生何處來 人生何處去)가 무척이나 처연하고 애절하게 느껴짐은 나의 중생심 때문이겠다. 나도 저 길을 걷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