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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파라오

: 이집트의 영광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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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중동/중남미/오세아니아 역사 top2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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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6년 0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1552g | 254*374*20mm
ISBN13 9788989721512
ISBN10 898972151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델리아 펨버턴 (Delia Pemberton)
대영박물관과 버크대학, 런던대학에서 고대 이집트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컨설턴트 : 조안 플레처 (Joann Fletcher)
영국 해로게이트 박물관에서 이집트 관련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왕들의 계곡 KV39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Ancient Egypt: Life, Myth and Art, Egypt's Sun King, The Egyptian Book of Living and Dying 등이 있다.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100개의 문을 가진 테베
고대 이집트의 장엄한 유적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고고학적 보물들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테베 건축물들의 위용과 화려함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100개의 문을 가진 도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보이오티아Boeotia에 있는 자신들의 도시에 테베의 이름을 따서 똑같이 테베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들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 이름은 그저 단순하게 이집트인들이 도시를 부르는 명칭 '타와세트ta-Waset'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타이페트ta-Ipet', 즉 룩소르 신전을 부르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로마인들은 이 신전을 군사 기지로 만들어 버렸다. 아랍인들이 이 도시를 룩소르el-Uqsor('궁성' 혹은 '성채'라는 뜻으로 라틴어의 카스트라castra에서 왔다)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오늘날 테베는 룩소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 '왕홀'이라는 뜻을 갖기도 하는 와세트 혹은 타와세트라는 도시의 옛 이집트식 이름은 사실 이 도시에 꼭 맞는 것이기는 하다. 도시 자체가 파라오의 눈부신 부와 호사의 상징이 아닌가. 저 먼 선사 시대의 보잘것없는 촌락이라는 다소 모호한 기원에서 고대 세계의 가장 강력한 도시로 발돋움한 테베! 왕의 권좌는 북쪽으로 제4나일강 폭포에까지 뻗어 현대 터키의 국경과 맞닿을 정도였으며, 남쪽으로는 깊숙이 현재 수단까지 장악한 제국을 호령하는 자리였다.
나일강 남쪽 계곡에 자리 잡은 테베는 서쪽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홍해로 나아가는 대상의 통로와 아주 가깝게 접근해 있는 지리적 여건을 톡톡히 즐겼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테베를 전략적 요지라고 보기는 힘들다. 테베가 그토록 중요한 도시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우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고대 이집트 역사에는 두 번의 절박한 위기 상황이 있었다. 이때 테베 출신의 왕조들이 질서를 평정하고 나라를 다시 통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들이 통치하는 동안 테베의 수호신 아문은 이집트 전역에서 섬김을 받는 주요 신으로 격상했다.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은 국가 대사원 가운데 하나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고대 테베의 정확한 크기는 이미 이루어진 개발 때문에 가늠하기 힘들다. BC 1세기에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도시의 둘레가 140스타디아stadia(약 26km)였을 거라고 추산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대략 41㎢ 정도의 면적이 아니었을까? 이는 거주 지역과 경작지를 포함한 계산이다. 그러나 저 광대한 묘역은 제외한 크기다. 묘역의 크기는 다시 8㎢를 이룬다.
테베는 중왕국과 신왕국(BC 약 2055~BC 1069년)을 거치면서 가장 큰 부흥을 누렸다. 그러나 종교적 성지로서 테베가 갖는 비중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어졌다. 예를 들어 카르나크의 아문 대신전은 최소한 중왕국 시절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섬김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이미 로마 시대만 하더라도 지중해권의 많은 관광객들이 테베를 찾았을 정도다.
어찌 옛날뿐이랴! 현재에도 테베를 찾는 방문객들은 장대한 신전과 웅장한 왕의 무덤 그리고 비록 규모는 조금 작지만 그 아름다움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개인의 유적들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오늘날 테베의 그림, 조각, 보석 그리고 무덤 부장품 등은 전 세계 박물관을 돌면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테베의 중요성은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테베에 대한 고고학의 천착과 연구는 여전히 계속되면서 새롭게 발굴한 유물을 끊임 없이 선보이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혀 주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탐구와 발견
테베의 유적에 남겨져 있는 많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낙서들이 증명하듯, 이미 고대부터 테베는 여행자와 학자의 발길을 잡아끄는 강렬한 매력을 발산했다. 현대까지도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 출처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나 디오도로스 혹은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 등과 같은 고전 작가들의 설명이었지 않은가.
중세에도 피라미드와 하이집트의 성지들을 찾는 서구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았다. 다만 멀리 떨어진 이집트 남부만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로마 시대 이후 테베를 방문한 서구인의 첫 기록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예수회 소속 신부 클로드 시카르Claude Sicard가 이 고대 도시를 찾은 것은 1715년이다. 그는 고대 이후 테베를 찾은 유럽 출신의 첫 번째 학자다. 시카르는 고전 문헌들을 꼼꼼히 살펴가며 멤논 거상과 왕들의 계곡 등을 찾아냈다. 그의 이런 발견은 후대의 탐험가들, 이를테면 덴마크 출신의 프레데릭 루트비히 노르덴Frederik Ludwig Norden이나 영국 출신의 리처드 포콕Richard Pococke 등에게 길을 열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지금 든 두 탐험가는 1737년과 1738년에 각각 테베를 방문해 처음으로 왕묘들의 지도와 스케치를 그린 사람들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주민들은 낯선 이방인을 아주 적대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초기의 탐사 작업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테베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1798년이다. 나폴레옹이 인도와의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집트를 강점한 것이다(그때까지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속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모든 유적을 상세하게 탐사할 목적으로 기술자, 설계사 그리고 각 분야의 학자들을 망라한 대규모 탐사대를 파견했다. 이들이 발견한 것 중에 저 유명한 로제타 석판Rosetta Stone이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바로 그 석판 말이다. 1801년 영국군은 이집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탐사대의 학자들은 남도록 허락했다. 남은 사람들은 부단히 연구를 거듭해, 그 성과를 『이집트 견문기』(총 24권, 1809~1822)로 펴냈다. 이 책은 발간과 함께 이집트 고대 유적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테베의 유적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1805~1849)의 노력 덕분이다. 여러 혁신적인 정책을 펼치며 이집트의 근대화를 주도한 알리에 힘입어 테베는 학자와 수집가의 발길을 잡아끄는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수집가들은 바로 이집트 현지에 파견된 각국의 외교관이었다. 이를테면 이집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를 지낸 베르나르디노 드로베티Bernardino Drovetti와 그의 영국측 동료 헨리 솔트Henry Salt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나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저 많은 테베 유물은 바로 이들이 활약한 결과다. 솔트의 고용인이었던 조반니 벨초니는 왕성한 탐사 작업으로 많은 중요한 유적들, 특히 '왕들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세티 1세의 묘를 발견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반니 벨초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기술자였는데, 한때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를 한 적도 있는 아주 강인한 체구를 지닌 사람이었다.
1822년 이집트 상형문자를 판독해 낸 프랑스의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처음부터 이집트 고적을 학문적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그는 특히 각종 유적과 예술품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폴리토 로셀리니Ippolito Rosellini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합동 탐사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방문해 테베에서만 두 달 반을 머물렀다. 칼 리하르트 렙시우스Carl Richard Lepsius가 조직한 독일 탐사대는 1844~1845년까지 활동을 벌이면서 테베의 유적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데에만 한철을 온전히 보냈다. 테베 고적지의 과학적인 연구를 선도한 영국 학자들은 아주 많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로는 로버트 헤이Robert Hay, 제임스 버튼James Burton, 알렉산더 린드Alexander Rhind, 존 가드너 윌킨슨John Gardner Wilkinson 등을 꼽을 수 있다. 윌킨슨은 아예 테베의 쿠르나Qurna에 있는 한 무덤 곁에 집을 짓고 1821~1832년까지 머무르며 연구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수천 장에 달하는 무덤의 비문과 벽화의 탁본을 떴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탁본들은 아주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문과 벽화의 상태가 상당히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테베의 탐사 작업은 그러나 대개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탓에 약탈과 파괴가 횡행했다. 1858년 무함마드 알리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사이드 파샤Said Pasha는 이집트 유적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사람으로 프랑스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를 선임했다. 이집트 문화재 관리국이 탄생한 것이다. 마리에트가 테베에서 발견한 것은 그때까지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던, 드라 아부 엘나가에 있는 제17왕조 왕들의 무덤이다.
문화재 관리국의 임무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우선 이집트에서의 고고학 발굴 작업을 규제 감독하는 것, 그리고 유적과 예술품을 보존하고 그에 대한 목록 및 기록을 남기는 것. 19세기 말에 이르러 테베의 유적은 관리국이 지정한 유물 감독관이 감독 관리하게 되었다. 유물의 무분별한 해외 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활동은 여전히 활기를 띠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후원과 함께 대학과 박물관 같은 학술 기구의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면서 체계적인 발굴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눈부신 발견들로 인해 테베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이집트학 연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마리에트의 후계자 가스통 마스페로Gaston Maspero는 1881년 전부 40여 구에 달하는 왕의 미라들이 묻힌 장소를 발견했다. 이 미라들은 고대에 무덤을 약탈한 다음 한데 모아 다시 묻은 것으로 보인다. 1898년 빅토르 로레Victor Loret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또 다른 왕들의 미라를 발견했다. 1903년에 이루어진 카르나크의 발굴 작업에서는 8000여 점이 넘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고대에 신전을 보수하고 개축하면서 묻은 것으로 보이는 1000여 개의 돌 조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테베에서 이루어진 가장 유명한 발굴은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보물들도 나왔다(98~119쪽 참조). 이 발견이 몰고 온 충격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못지않은 다른 중요한 발굴들은 자연스레 빛이 바랠 정도였다. 이를테면 에르네스토 스키아파렐리Ernesto Schiaparelli가 1905~1909년까지, 그리고 베르나르 브뤼에르가 1917~1947년 사이에 데이르 엘메디나에서 벌인 발굴 작업은 역사적 의미에서 카터의 그것과 견줄 만한 것이었지만, 규모나 부장물의 화려함에서 압도당했다. 또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1907~1938년까지 개인의 묘들을 일일이 추적해 가며 고생스레 만든 자료도 그늘에 묻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뿐인가? 문화재 관리국이 유적을 보호 관리하려 한 노력도 별반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00년대 초기에 테베에서 유적 감사관을 지낸 아서 웨이걸Arthur Weigall은 꾸준히 유적 관리 사업을 주도해 가면서, 일련의 번호를 매긴 현대식 무덤 분류 체계를 도입하였다.
테베의 유적에 대한 탐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분기마다 새로운 발견을 내놓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최근의 발견으로는 람세스 2세의 여러 아들들이 묻힌 무덤(KV5)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유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해마다 몰려드는 많은 관광객들, 대기 공해, 아스완댐의 축조에 따른 지하수면의 부상 등은 테베 유적의 기본 골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유적을 관리 보존하는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의 연구 방법과 유적의 보존 기술이 끊임없이 개발되어야, 테베의 유산은 앞으로도 계속 연구 보존되면서 미래의 세대에게 넘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나크와 아문 신 숭배
테베에 자리 잡고 있던 '아문의 땅'은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성지로 격상한다. '숨은 자'라는 뜻의 테베 신 아문은 이집트 북부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태양신 라Ra와 하나로 녹아들어, 최고의 신 아문-라Amun-Ra가 탄생하게 된다. 바꿔 말해서 테베는 이제 '남쪽의 헬리오폴리스'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왕은 인간과 신을 중개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따라서 왕은 이론상으로는 모든 신전의 최고 사제로, 각 신전에서 치러지는 예식을 집전할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역할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으랴. 매일같이 드려야 하는 예배의 몫은 자연스레 각 사원의 사제들 몫이 된다. 물론 사제들 사이의 위계질서도 엄존했다. 왕을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최고 사제 혹은 제1예언자로부터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말단 승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역할도 엄격하게 나뉘었다.
이집트 종교의 목표는 국가와 우주를 관통하는 신적 질서를 지켜 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정치는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신전, 다시 말해서 '신이 사는 집'은 신을 섬기는 일 외에도 각종 행정 관청의 역할을 했으며,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인 동시에 재판이 열리는 사법부이기도 했다. 각 사찰에는 사제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작업장이 딸려 있었다. 이 작업장은 신을 묘사한 각종 조각이나 그림을 만드는 일을 주로 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사적인 무덤 부장물이나 파피루스 제례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은 물론 사찰의 재산으로 관리되면서, 곡물 등의 형태로 각 고용원들의 품삯으로 지불되었다. 사찰 직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간인들은 따로 자신의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찰의 살림을 위해 봉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전은 대 고용주나 다름없었다. 커다란 농토와 초지를 소유하고, 각종 짐승들을 놓아먹이면서 거의 모든 수요를 자급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된 경제력은 곧 사제들로 하여금 상당한 정치권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각 신전을 중심으로 그 막대한 재산이 상속됨에 따라,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소위 '사제 왕권' 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문 신을 섬기는 핵심 성소인 카르나크는 고대 테베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으며, 동시에 도시 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곳이었다. 거의 2.5㎢에 달하는 카르나크 신전은 모두 세 개의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문 신에게 헌정된 중앙 구역이 가장 크고 또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런 아문의 대신전과 나란히, 다른 주요한 신들을 섬기는 작은 규모의 사당과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그 북쪽은 테베의 전쟁신 몬투의 영역이고, 남쪽은 아문의 아내인 여신 무트의 영역이다.
아문 신전을 이루고 있는 각종 유적들은 거의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즉 중왕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시대에 이르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물론 개중에는 훨씬 더 오래된 구조물도 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아문의 대신전은 거듭 확장되고,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숱한 개수 작업을 거치면서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전체 신전의 주축은 동서로 그 정향을 잡으면서 나일강을 마주보고 매일같이 뜨고 지는 태양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신왕국 시대에 들어서는 다시 새로운 남북축이 첨가되면서 남쪽의 무트 영역과 룩소르 신전을 잇는 행진로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두 축을 중심으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신전은 더욱 몸집을 불려 온 것이다.
전통적으로 신전에서는 성소(가장 신성한 곳, 대개 신상들을 모신다)가 중심이 된다. 성소의 앞에는 하나 또는 두 개의 기둥 홀이 들어서며, 다시 그 앞으로 기둥들이 늘어선 뜰이 있고 전면에 파일론(신전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이 세워진다. 종종 신전에는 더 많은 파일론들이 들어서곤 했는데, 이는 선왕들의 유적을 가림으로써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아문 신전에 파일론을 세운 왕들은 무척 많다. 파일론 사이의 공간은 자연스레 안마당을 이루거나, 제2와 제3파일론 사이처럼 커다란 기둥 홀이 되기도 했다. 신전의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부분, 즉 제1파일론은 이전에 신전 밖에 있던 두 개의 구조물을 싸안은 마당을 이루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개의 구조물이란 람세스 3세의 작은 사찰과 세티 2세의 사당에 해당한다.
신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제나 신전 고용인이 아니더라도 신전을 방문할 수는 있었다. 특별한 업무가 있는 경우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밖에 테베의 융성한 시절을 자축하기 위해 축제가 열릴 때에도 일반인이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평상시에 평민은 신전의 성역에 발도 들여놓아서는 안 되었지만, 축제가 열리는 동안만큼은 얼마든지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특히 축제 기간 동안 아문을 위시한 카르나크의 여러 신들은 성소를 떠나 화려한 행렬과 함께 세상을 돌아보아야 했던 것이다. 종종 배로 꾸며진 조형물을 타고 세상을 주유하려니, 사람들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겠는가.
테베에서 열리는 주요 축제로는 여름의 오페트 축제와 봄의 '계곡 미의 축제'가 꼽힌다. 2주에서 4주까지 걸리는 오페트 축제가 열리는 동안에 아문 신과 그의 아내 무트 그리고 아들 콘수의 조각상들은 카르나크를 떠나 아문의 '남쪽 성전'인 룩소르 신전으로 옮겨진다. 그곳에서 왕의 권위를 새롭게 빛내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계곡 미의 축제'에서 신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왕들의 묘역으로 향한다. 테베의 백성이 신들을 호위함은 물론이다. 이들은 선조의 묘 앞에 부복하고 제사를 드렸다.

진리의 터를 위해 봉사한 이들
묘 건축 인부들의 촌락, 데이르 엘메디나

이집트의 평민들이 살았던 곳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고대 무덤 건축 인부들의 촌락은 테베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매력적인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왕들의 계곡'과 '왕비들의 계곡' 중간 저편의 먼 사막에 가려져 있는 촌락은 제18왕조 초기에 형성되었다. 이른바 '진리의 터를 위해 봉사한 이들'이 살았다는 촌락은 왕실의 무덤을 짓기 위해 일하던 숙련공과 예능인의 마을이었다. 거의 400년 동안 사람들이 산 촌락은 제19왕조에 들어서면서 상당히 커졌다가 결국 혼란이 극심했던 제20왕조 후반에 이르러 포기되고 말았다. 그 외딴 입지로 인해 리비아 침입자들의 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70여 채에 이르는 가옥들 중에 그 주인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열두 채 정도다. 집 주인의 이름은 문설주에 적혀 있었다. 주춧돌 위에 진흙 벽돌을 쌓아 올린 가옥은 그 기초 설계가 마치 불뚝 솟은 작은 사당과 같다. 거실에는 나무 기둥으로 받친 볼록한 천장이 있으며, 부엌에는 찰흙으로 빚은 화덕이 마련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실이 있고, 그 안에는 나름대로 소중한 생필품 등을 저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 쪽으로 올라가면 침실과 함께 벽장 같은 것이 나타난다. 내벽에는 회칠을 했으며, 그림을 그려 놓은 곳도 있다. 그림은 대개 화려한 옷감을 흉내 낸 기하학적 도형에 색칠을 한 것이다.
이집트 가옥 안에는 가구가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소박했다. 방은 손바닥만 하다. 목재가 귀하고 비쌌기 때문이리라. 옷과 화장품 등 좀 값나갈 만한 것들은 바구니나 항아리 혹은 나무 궤짝 안에 보관했다. 식기는 주로 나무 접시였으며, 때로는 가지고 다니기 쉬운 선반 등에 보관했다. 형편이 나은 집에는 나무 침대와 걸상 등이 있었으나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초라한 집들에서는 진흙을 빚어 만든 길쭉한 물건을 낮에는 의자로, 밤에는 침대로 썼던 것 같다.
많은 개인 용품들 외에도 데이르 엘메디나의 무덤들에서는 일종의 기록 문서와 같은 것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개는 파피루스였지만, 돌판을 깎은 도편이나 도자기 파편 등도 기록을 위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들 중에는 편지, 공문서, 노래, 이야기, 스케치, 기도문, 시, 심지어는 세탁물 목록까지 있다. 이런 자료들을 취합해서 고고학자들은 당시의 생생한 생활상을 재현할 수 있었다.
데이르 엘메디나의 노동자들은 한 주(이집트의 일주일은 열흘이다)의 8일이나 9일을 일했다. 물론 '왕들의 계곡'이나 '왕비들의 계곡'에 있는 현장에서 말이다. 잠은 그곳에 마련된 임시 막사에서 잤으며, 집에는 주말에만 돌아왔다. 주중에 마을은 여인 천하였다. 이들은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가사 보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순번이 정해진 청소부나 세탁부들이 정기적으로 교대를 해 가며 가사를 도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유대는 매우 끈끈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이 워낙 외진 곳에 있었던 탓이리라. 그 결과 숱하게 겹사돈을 맺는 집안들이 적지 않았다. 공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도 마을에는 의사, 대서인, 율사, 침모, 점쟁이, 세리, 채소 상인 등등이 넘쳐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술이나 장기를 물건이나 기타 서비스 등과 맞바꾸어 먹고 살았다.
접근하기 어려운 외딴 곳에 촌락이 자리를 잡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왕묘가 간직한 비밀이 쉽사리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보안 방침이었던 것이다. 촌락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 즉 식료품, 물, 의복 등은 계곡으로부터 수송되어 왔다. 물론 보급이 언제나 순조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20왕조 때에는 수차례에 걸쳐 보급 중단에 항의하며 적절한 대책을 요구하였다. 주민들은 지역의 신전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 아니었을까? 람세스가 왕위에 오른 지 29년이 되던 해에 노동자들이 쓴 탄원서는 다음과 같은 울부짖음을 담고 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딜 수 없어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 옷도 약도 생선도 채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때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선량한 주군 파라오와 부왕 그리고 상부에게 우리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려 주십시오.'
데이르 엘메디나에서는 주기적으로 그 많은 신들을 섬기는 축제가 베풀어졌다. 촌락에서 출토된 신왕국 말기 때의 작업 기록을 보면, 주민들은 축제를 준비하고 본 행사를 벌이고 그 뒷감당을 하기까지 1년의 3분의 1이나 소비했다. 테베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데이르 엘메디나의 주신은 아문이었다. 데이르 엘메디나에는 촌락이 형성된 초기부터 아문 신을 섬기는 작은 사당이 세워져 있을 정도였다. 주민들은 그밖에도 많은 신들, 특히 글짓기의 수호신인 토트와 장인 수호신 프타를 받들었다. 하토르 여신도 마을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신이었다. '서쪽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여신은 사후 세계에서 죽은 자를 맞아 주는, 죽음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토르에게 헌정된 한 채의 작은 사당은 마을의 북동쪽, 그러니까 마을의 경계선 노릇을 하던 담장의 외벽에 바로 붙여 세워져 있었다. 데이르 엘메디나에서 치르는 하토르 숭배를 당시 이집트가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마을이 폐허가 된 뒤에도 그 사당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사당은 이후 수차례에 걸쳐 재건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단장한 것이다.
하토르의 사당에는 거의 붙다시피 한 한 채의 사당이 더 있다. 살아서 신이 된 왕 아멘호텝 1세와 그의 모후 아흐모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사당이다. 촌락의 창설자로 여겨지고 있는 아멘호텝 1세와 그의 모후는 데이르 엘메디나의 수호신이다. 이 왕족 모자를 새긴 작은 장식들은 촌락의 집 안이나 그들의 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멘호텝과 아흐모세 네페르타리를 섬기는 사당은 1년 내내 촌락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겨울마다 열리는 '대축연'은 말할 것도 없고, 사당 앞에서 결혼식이 열릴 때면 일꾼과 그 가족들은 나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놀았다.
데이르 엘메디나 주민의 대부분은 과외로 지역 사당에서 사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중은 국가적인 규모의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들은 성전에 제물을 드렸으며, 각 가정마다 꾸며진 제단에 신의 형상들을 모셨다. 물론 나름대로 조촐하게 신께 경배 드리는 곳을 마련하기도 했다. 데이르 엘메디나에 있는 사당의 경내에서 신에게 은총을 구하는 많은 예물과 석주들이 발견되었다.
마을의 대중 종교는 보다 지방색이 짙은 신들을 주로 섬겼다. 이를테면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가정의 신인 베스Bes 같은 경우다. 대중 종교의 또 다른 전통적인 요소는 마술이다. 주문과 부적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독성을 가진 동물에게 물리거나 쏘이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호신책으로도 쓰였다. 생명을 교란하고 위협한다는 죽음의 귀신들도 부적이나 주문으로 막았다. 죽은 원귀들을 달래기 위해 가정에는 가짜 문을 달아 언제든지 가족을 방문할 수 있게 배려했다. 조상을 기리기 위한 위패를 특별히 마련된 추모 장소에 갖다 놓기도 했다.
데이르 엘메디나의 공동묘지는 마을을 끼고 계곡의 양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으며, 묘는 각 가정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무덤의 배열을 보면 당시 촌락에서 누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위치가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계곡의 북서쪽 측면을 따라 단을 이루고 있는 무덤들은, 주로 공사 감독이나 공무원 같은 마을 유지들의 것으로, 단아한 사당까지 갖추고 있다. 반면 신분이 낮은 노동자들은 그 반대편에 땅을 파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 아무 장식도 없음은 물론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대비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무덤에 관한 한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인 이들은 서로의 솜씨를 교환해 가며 고품격의 묘를 지었다. 이런 작업은 대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주말'에 이루어졌다. 평민의 무덤이 왕족의 그것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꾸어져 있을 정도다. 더욱 특이한 것은 묘 안에 그려진 신화에 관한 벽화들이다. 왕묘의 그것을 보고 그 주제를 본떴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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