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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선비를 탐하다 세트

공주, 선비를 탐하다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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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720쪽 | 140*210*40mm
ISBN10 8975277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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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전이 형성되어 있는 고을의 번화가. 물건 값을 흥정하는 데 정신이 없어야 할 장 안의 사람들이 길가 양쪽 끝으로 붙어 서서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행렬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데 모인 복잡한 상황인지라 치경은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앞서 나가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왔다.
“노비들입니다. 이번 변란 때 참수된 자들의 일족과 그 사노(私奴)들로 보입니다.”
“그렇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크게 세 발짝쯤 물러나 있던 서율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지긋지긋한 피바람은 과연 언제쯤이면 멈추게 될는지. 저도 모르게 연상된 고통스러운 기억이 힘겨워 억지로 머릿속을 비워내는데, 가까이서 또랑또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들은 모두 이번에 새로 관노비가 된 자들이냐?”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본 서율과 치경은 잠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착각에 빠졌다. 기껏해야 서율의 가슴팍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조그만 계집아이가 꼬질꼬질한 무명옷을 걸쳐 입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척 봐도 사대부인 서율과 건장한 어른인 치경에게 저 아이가 반말지거리를 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믿고 넘어가려 하였으나 밤톨만 한 저 아이, 두 사람의 순간적인 착각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뭘 그리 멍청하게 보고만 있느냐? 내가 지금 묻고 있다!”
“근데 이 조그만 녀석이…….”
“무엄하구나!”
치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꿀밤을 한 대 먹이려 하자 아이는 흠칫 놀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서 호통을 쳤다. 아이의 잔망스러움에 멈칫한 것도 잠시, 이내 코웃음을 치며 다시 쥐어박으려는 찰나,
“그만. 그만두게.”
옆에서 보고 있던 서율이 끼어들었다.
“지금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치경의 속 깊은 뜻을 서율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상대가 그들이 아닌 성정이 거친 양반이었다면 지금쯤 저 아이는 끔찍한 매질을 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서율은 눈앞의 여아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뽀얀 얼굴에 그림같이 자리 한 먹빛의 눈동자. 그 큰 눈망울은 맑고도 투명해 세상사 어려움이란 요만큼도 겪어보지 않은 듯싶었다. 게다가 말투와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대광실의 금자둥이마냥 어찌나 도도하고 당당한지. 걸치고 있는 저 남루한 옷이 외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또 가만 보니 저 아이, 어디서 많이 본 듯 매우 낯이 익은 인상이다.
‘대체 이 친숙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다.---「1장. 푸른달의 첫 만남」중에서

“혼인을 하였느냐?”
어느 순간 아이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싶더니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서율은 빙긋 웃으며 답을 해준다.
“아직 미취(未娶)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 더 자라 그대를 나의 지아비로 삼아 줄 것이야.”
“뭐? ……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당찬 포부에 서율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 기뻐서 그러하냐?”
“내가 마음에 든 것이로구나?”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세차게 끄덕거린다.
“한데 어찌하여 네 명자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
“보모가 명자를 함부로 알려주지 말라 하였다. 내 오늘 보모와 담판을 짓고 내일 다시 와서 명자를 알려줄 것이다. 대신 지금은 나이를 알려주마. 나는 올해 아홉이 되었다. 그럼 이제 내가 자랄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약조를 해주겠느냐?”
아이가 다짜고짜 새끼손가락을 쳐들더니 조바심이 돋아난 얼굴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내 한번 숙고해보도록 하지.”---「1장. 푸른달의 첫 만남」중에서

“나는 이제, 그런 전하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부왕을 부정하는 공주의 엄청난 발언에 서율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누군가 엿들었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한 그에 비해 은명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완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왕은 혜빈과 옹주 그리고 다른 후궁들에게 기꺼이 양보할 것이다. 나는 오라버니와 빈궁마마만 있으면 된다.”
왜 첫날 보지 못하였던 것일까. 변하셨다. 맑았던 그 눈에 상처를 담아버렸구나…….
아픔이 배어 있는 어린 공주의 두 눈이 서율의 가슴마저 울렁이게 만든다.
“허나 평생을 오라버니와 빈궁마마 곁에서 살 수는 없다. 공주가 하가해야 하는 나이는 보통 여덟에서 열둘. 곧 부마도위가 정해질 것이고 나는 궐을 나가야 한다. 하여 궐 밖에도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게 너라고 생각한다. 너라면 내가 믿을 수 있다.”
“……”
은명은 할 말을 마치고 그에게서 답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서율은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침묵을 고수할 뿐이다. 지난봄, 바로 이곳에서 그와 했던 언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니 알겠다고 하면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토록 입을 다물고만 있는 것일까. 마음이 급해진 은명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아홉 살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맹랑한 소리를 뱉어내었다.
“나의 의빈이 되어다오. 그대에게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보장하여줄 것이다.”
---「4장. 푸른달의 첫 만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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