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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꽃말을 읽다

시의 꽃말을 읽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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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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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5년 07월 2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390g | 150*210*20mm
ISBN13 9788939207349
ISBN10 893920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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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안상학
196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년 11월의 신천」이 당선되면서 시 쓰는 세상으로 나왔다.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등과 인물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를 펴냈다. 2008년 봄부터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설립과정에 참여하였고, 2014년 여름까지 사무처장 일을 맡아보았다. 현재는 고향 안동에서 글쓰기에 전념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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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 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 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 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이 다 젖었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점점 홍홍 흘러가는 걸로 봐서는 여름날인가. 모르겠다. 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사계절이 다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데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의 풍경인가. 이른 봄 해바라기 하는 마음이 보이는 듯도 하고, 늦가을 밤 어디선가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시 어디쯤에선가 서릿발이 느껴지는 듯도 하고, 봄날 아지랑이 같은 숨결이 감지되는 듯도 하다. 계절은 무슨 소용. 다만 인연, 오는 것들을 맞이하는 설렘이 어떤 짧은 만남의 격렬한 파동을 거쳐 마침내 떠나가는 것들의 잦아듦이 처연할 따름이다.
사람의 발이 있기는 있는 걸까. 그늘을 따라 옮겨 앉는 일도 햇살을 따라 자리를 바꾸어가는 일도 다 헛된 것만 같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발이 없다. 결국 내려놓느니 마음이다. 은근 축축하다. 체감은 시리기까지 하다. 하긴, 사람 사이에 꽃잎이 지는데 봄가을을 가리겠는가 여름겨울을 나누겠는가.



여자비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이라고 한다’는 이 시의 화법을 빌려 나도 거들 말이 있다. ‘자비慈悲’라는 말이 있다. ‘慈’의 상형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하고, ‘悲’의 상형은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마른 젖을 물리며 피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모순된 글자들을 한 데 묶어 최선의 사랑이라고 한다.
기쁨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슬픔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는다. 세상 누구도 어느 누구의 아픈 몸을 대신 아파 줄 수는 없지만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배고픈 아이를 보거든 먹을 것을 찾아주고, 마음이 아픈 사람을 보거든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 자비다. 무연자비無緣慈悲, 인연이 없을수록 더.
이 시처럼 세상에는 배고파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안고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어미가 있다. 이 아픈 사랑을 외면하는 기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慈’와 ‘悲’는 늘 말로만 하나로 묶여 있지 현실은 따로 국밥이다. 이 시에서처럼 아이만이라도 배가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은 굶어죽어도 좋은 어미의 혀를 씹는 슬픈 사랑만이 외롭다. 여자비, 여‘慈悲’? 혹독하게도 내 눈에는 여전히 여자‘悲’로 보인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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