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로 선택을 고민하는 이에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방식의 연애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수정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여기는 친구에게 파블로프의 개 실험과 같은 심리학 실험들이 주는 메시지는 뭘까?
인문학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문제 상황 ‘X’가 발생했을 때, 정답은 바로 ‘B’예요”라며 답을 떠먹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인문학은 분명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물론 메시지를 쉽게 발견할 수는 없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인문학이 주는 바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답에도 여러 의미가 있기에 그것이 갖는 함의는 더욱 넓다. 이런 인문학은 수저로 바로 떠먹을 수는 없지만 조금의 가공을 거친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재료와 같았다. 아, 신선한 재료라는 표현보다는 수백 년, 길게는 2000년 이상 묵은 깊은 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러한 장을 우리 삶에 버무린 결과가 바로 이 책에 있다. 오래 숙성된 장일수록 단맛, 짠맛, 구수한 맛, 감칠맛 등 다양하고 깊은 맛을 내듯 여러 철학자의 이론도 우리의 삶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는 진짜 현실적으로 사는 삶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고,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통해서는 늦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반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로크,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이론을 통해서는 실패가 부정적이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통해서는 우리의 연애의 목적에 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통해서는 이성 친구의 속마음에 대해서,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을 통해서는 외로움과 결혼의 관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여러 진로를 거치고도 여전히 진로를 탐색 중인 E를 떠올리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로에 관해서는 ‘결정했다’ 혹은 ‘이제 더는 고민은 없다’라는 말이 무색한 것은 아닐까? E의 고민에서 비롯된 나의 고민. 그 끝에 든 생각은 이것이다. 진로를 고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기’가 아니라 진로에 관한 질문들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 “진로를 언제 결정해야 하나?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나?”, “10년 후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하고 있나?” 등의 질문에 늘 열려 있는 것. 갑자기 떠오르는 이런 질문들을 무시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대면해보는 것.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를 가질 때가 바로 진로 결정의 결정적 시기였다. 진로 결정 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정적 시기가 지금이냐 혹은 더 이전이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그때를 결정적 시기로서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흘려보낼 것인가였다. 삶에서 진로의 결정적 시기를 갖느냐 혹은 갖지 않느냐, 언제 갖느냐, 몇 번 갖느냐, 어떻게 갖느냐는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늦었다는 것은 과연 문제일까」 중에서
우리는 종종 잊는다. ‘나는 실패했다’라는 문장 뒤에 ‘나는 성공했다’라는 문장을 이어 쓰기 위해 중간에 필요한 접속사는 ‘하지만’이나 ‘그러나’가 아니라, ‘그래서’나 ‘그랬기 때문에’라는 사실을.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나는 실패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 중에서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주관주의 확률 이론이 말하는 이런 확률도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K가 정치인이 될 통계적 확률을 0.0001퍼센트라 가정하고 주관적 확률을 30퍼센트라 추정한다 해도 그가 정치인이 될 ‘실제’ 확률은 0퍼센트와 100퍼센트 둘뿐이다. 정치인이 되거나 혹은 안 되거나. 되면 100이고, 안 되면 0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정치를 할 가능성이 너무 적다며 아무런 실천도 안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가 정치인이 될 확률은 무조건 0퍼센트이다. 하지만 평소 지지하던 정당에서 활동하든가 지방선거에 출마한다면 그가 정치인이 될 확률은 100퍼센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하는 일의 성공 가능성이 너무 적다며 아무런 시도조차 안 하는 것, 진작 포기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100퍼센트의 확률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의 절대성」 중에서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들은 층위가 있다. 가장 하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의식주나 성욕 등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들이다. 그리고 상위 욕구로 갈수록 타인과 관계 맺고 싶은 사회적 욕구, 꿈을 실현하고픈 자아실현 욕구 등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욕구들은 아무렇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위 욕구가 충분히 만족되어야 상위 욕구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안 나온다.
우리의 가장 기본 욕구는 취직 욕구이다. 취직을 하느냐 마느냐에 우리의 생존이 걸려 있다. 취직 욕구가 해결되어,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이후의 욕구를 고려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고기를 사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해결해야 어떤 국가에서 생산된 고기를 사 먹을지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는 정말 이기적일까?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바로 옆의 타인의 고통에도 침묵하고, 심지어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조금이라도 더 이기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그리고 이 모든 이기적인 행동들의 이유가 우리의 생존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우리는, 과연 이기적일까?
---「우리의 이기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