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그리는 꿈의 역사, 그 속에 담긴 진실
김기옥 (http://blog.yes24.com/dfmusic)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웰컴 투 동막골》... 2006년 3월을 기준으로 한국 영화 흥행의 상위 5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들이다. 각기 다루고 있는 구체적 소재와 그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친구》를 제외한 네 편의 영화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나 한 개인의 꿈을 향한 도전이 아닌 우리 민족 모두의 과거를, 그 과거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영화들이다.
관객동원 천만 명은 1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극장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의 약 절반 이상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의미다. 남녀노소, 직업, 계층, 지역, 이념 등과 같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없이 우리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위의 영화들을 즐겼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실제 있었던 사건들, 그것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들을 관객들은 단순히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고, 그들의 역사 인식을 정립하게 된다. 이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의 성공을 결코 ‘영화산업’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자는 팩트(fact : 사실, 실제)를 강조하는 역사와 픽션(fiction : 허구)의 장르인 영화가 결합하여 우리 인구의 절반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팩션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역사에 관한 논지를 전개하고 있지만, 단순히 각각의 영화들이 어떻게 역사를 다루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크게 세 가지의 주제, ‘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입되는 매트릭스로서의 역사,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와 상상력을 주입한 사극의 차이, 즉 원본을 복제하는 유사성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상사성으로의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과서 밖의 ‘탈국사적’ 역사교육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기존에 우리에게 ‘주입’되어지던 영화와 역사에 관한 시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우리가 학창 시절 달달 외워댔던, 그리고 지금은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국사’에 대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와 같은 각각의 ‘국사’는 해당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삶을 지배하는 매트릭스다. 그 매트릭스가 나는 누구인지의 정체성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의 삶과 목표를 주입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 즉 국사를 배우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 땅 위에서 일어난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국사는 우리를 하나로 묶고, 다른 나라와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게 하며,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과거의 영광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든다. 매트릭스가 인간의 머리에 플러그를 연결하여 인간의 마음을 통제했듯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프로그램은 인간을 지배한다. 국사라는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우리는 더 넓은 시각으로 세계를,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외우도록 들었으며,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그 배경에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배워왔다.
저자는 이러한 교과서적인, 민족이라는 거대 조직으로 우리 모두의 역사를 통합하려는 사상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전쟁이 벌어진 구체적인 배경과 당시의 국제 정세 등에 대해서는 일절 논의가 없다. 그저 “전쟁이 났대”라는 말 한 마디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설명할 뿐이다. 당시의 정치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는 역사성을 배제하고 ‘전쟁’과 ‘형제’에만 집중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전쟁 속에서 이성을 잃고 살인마가 되어 가는 사람이,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날 꿈에 부풀어 전쟁을 빨리 끝내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보리쌀을 탈 목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째서 이들의 모습은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책상 앞에서 전 국민을 고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권력자들보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아야 했던 민중의 역사가 우리에게 더욱 아프고 귀하지 않은가.
역사는 문자화되어 텍스트로만 접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 그리고 권력과 이념의 충돌만이 역사라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현한 영화들은 오히려 교과서보다 더욱 강렬한 힘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를, 그 시대의 아픔을 전달할 수 있다.
한편으로 딱딱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이 책은 영화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독자의 집중과 이해를 돕는다. 우리의 역사도 이래야 할 것이다. 머리에 역사를 적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시절을 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