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배〉 삼 년 전 느티말 할머니 집에 살게 된 진수는 마을 어귀로 자동차만 나타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쩌면 엄마나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기대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마을 어귀로 들어온 시꺼먼 자동차에서 찐빵 같은 얼굴과 장독 같은 몸집을 한 뚱보 가족이 내린다. 뚱보 가족은 피서를 왔다며 진수 할머니 집 옆 민박집에 머문다. 못된 뚱보 녀석은 무턱대고 진수를 거지 취급하며 괴롭힌다.
“니, 거지제?” 뚱보 녀석이 입속에 과자를 쏙쏙 넣으면서 다가왔다. 입안에서 파삭파삭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갔다. “내 그칼 줄 알았다, 이 거지 새끼야. 뭐 얻어묵을라꼬 왔노?” 무시를 당하고도 잠자코 있는 내가 멍청해 보였다. “자, 정 묵고 싶으면 이거나 주워 묵어라.” 뚱보 녀석이 토막 난 과자 하나를 툭 던졌다. 23쪽
진희가 작대기로 구렁이를 잡아서 놀고 있을 때였다. 뚱보 남매가 또 진수를 거지새끼라고 놀리면 다가왔다. 순간 진수에게 뚱보 녀석을 혼내 줄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뚱보 녀석 발밑에 구렁이를 던지는 것! 바싹 얼어 오줌이라도 질질 싸면 통쾌한 복수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구렁이가 뚱보 녀석의 어깨에 척 걸쳐지고 만다. 뚱보 녀석은 바로 기절하는 바람에 뚱보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뱀한테 물린 거 아이가? 119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뚱보 아줌마가 뚱보 녀석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울부짖었다. “수선시럽기는. 독 없는 기다.” “잘못되면 할매가 책임질 끼라요?” 우리 할머니 말에 뚱보 아줌마가 도끼눈을 뜨고 대들었다. 33~34쪽
진수는 뚱보 녀석에게 사과를 하려고 민박집을 맴돌다가 뚱보 가족이 쫄딱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다음 날부터 뚱보 녀석이 갑자기 배고픈 얼굴을 하고 진수를 졸졸 쫓아다닌다. 진수는 그런 뚱보 녀석이 밉지만은 않다. 그날부터 진수는 뚱보 녀석 두호와 친구가 된다. 진수는 두호가 뚱뚱한 몸대로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을 메워 주고 있는 것 같다. 진수는 두호에게도 느티말 약국의 진정제를 선물하고 싶어 개울가로 불러낸다.
어느새 우린 발가숭이가 되었다. 두호가 움츠렸던 몸을 쫙 펴고 본격적으로 물장난을 쳤다. 혼자 물속에서 방방 뛰다가, 헤엄을 치며 물장구를 치다가, 나한테 물을 날리면서 킥킥대고 뒤로 벌러덩 눕기도 했다. 물 위에 두호의 배가 보름달처럼 둥실 떴다. “자, 닦아라.” 난 두호에게 먼저 수건을 내밀었다. “기분 좋제?” “어, 되게 시원하고 좋다.” 53쪽
〈나무 물고기〉 기열이는 진수에게 복수하려고 개학하는 날만 기다렸다. 자신을 때려눕히고 입술까지 터뜨린 진수를 어떻게든 골탕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복수는커녕 진수와 또 한 번 짝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만 벌어진다.
승미 덕분에 내가 먼저 뽑게 되었다. 행운의 숫자 7번이었다. 나는 승미가 8번을 뽑기를 원했지만 승미는 10번을 뽑았다. 이제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아니다, 진수는 안 된다. 태권이도 싫다. “다음 진수!” 진수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갔다. 8번! 이럴 수가. “야, 둘이 천생연분인가 보다. 벌써 세 번째 아냐?” 74쪽
기열이는 진수와 다른 아이들 때문에 스쿨버스도 타기 싫다. 바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최고급 자전거를 사 달라고 한다. 며칠 뒤 엄마가 보낸 엄청 비싸 보이는 자전거가 할머니 집으로 도착한다. 다음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간 기열은 이번에야 말로 진수를 제대로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쟤가 내 자전거 타다가 망가뜨려 놨어.” 나는 발로 자전거를 툭 차면서 소리쳤다. 개집 청소를 하던 외삼촌이 다가오더니 개똥 냄새 나는 손으로 체인을 만지작거렸다. 순식간에 자전거는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래도 소용없어. 다 물어내라고 할 거야.” “이놈아야, 그기 친구한테 할 소리가?” “할머닌 빠져! 내 문제야. 그리고 친구 아니라고 했잖아.” 할머니가 찌푸렸던 미간을 펴더니 부엌으로 갔다. 그러고는 따끈따끈한 만두를 내와 내가 아닌 진수와 진희한테 건넸다. 나는 손으로 그 만두를 툭 쳐 냈다. 땅바닥에 떨어진 만두는 외삼촌이 주워 물에 씻어 먹었다. 할머니는 새 만두를 가져왔다. “할머니는 누구 편이야?” 나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95쪽
기열은 하천 환경 봉사 활동을 나간다는 소리에 귀가 쫑긋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다다랐을 때 얼른 진수 옆으로 다가셨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어깨로 진수를 툭 밀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고 말았다. 진수는 발목이 부러지고 기열은 진수 대신 오 일 동안 진수 할머니를 돕는 벌을 받게 된다.
“이놈의 짜슥, 와 이리 귀찮게 구노.” 다섯 번째 애걸복걸하는 통에 진수 할머니가 걸음을 멈췄다. (중략) 진수 할머니가 물병을 내밀었다. 색깔이 누리끼리했다. “썩은 물 아니에요?” “까탈시럽기는, 쯧쯧. 뽕잎 달인 물이다.” 나는 갈증이 사라질 때까지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구수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땀도 가려움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딱 오 분 쉬었을 뿐인데 진수 할머니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툴툴대며 얼마쯤 가자 새소리 바람 소리밖에 안 들렸다. 꼭 산이 숨 쉬는 소리 같았다. 109~110쪽
드디어 진수 할머니를 돕는 마지막 날.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기열은 온몸이 가려워 미칠 것만 같다. 아토피 벌레들이 총공세를 펼치는 것 같다. 기열은 느티나무가 보이자 그대로 달려가 개울물에 텀벙 뛰어들었다.
발을 딛고 서자 물이 가슴까지 왔다.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고개를 드니, 개울가에 있던 진수와 진희와 똥개 살살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냐?” 진수의 말에 나는 손바닥에 물을 퍼 담아 진수와 진희와 똥개를 향해 뿌렸다. 꽁지 빠진 닭처럼 허겁지겁 달아나는 진희와 살살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진수는 물러서지 않고 목발로 나를 향해 물을 날렸다. 우린 한동안 물싸움을 했다. 햇빛에 반사된 물방울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117쪽
〈나무 새〉 미숙은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노랗게 염색하고 스모키 화장을 한 채 거의 이십여 년 만에 느티말에 내려왔다. 민박집이 호태네 집 바로 옆이라는 점이 불안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이곳을 택한 것은 놈들을 따돌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미숙은 진수와 진희, 그리고 기열이를 보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오 년 전 무작정 엄마에게 맡긴 딸 희주가 생각나서.
미숙은 노랫가락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엄마.” 진희가 미숙의 품에 안겨 잠꼬대를 했다. “아줌마한테서…… 엄마 냄새 난대요. 진희가.” 진수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순간 진희의 이마를 쓰다듬던 미숙의 손길이 멈추었다. 수전증 환자처럼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숙은 이렇게 평온한 날들이 얼마 만인지 떠올리다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신세만 처량해질 뿐이었다. 151쪽
미숙은 진수와 진희가 어릴 적 친구의 호태의 아들딸이고, 기열이가 단짝 친구였던 한영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슨 사연이 있어 아이들만 시골에 있는 걸까? 얼굴에 그늘이 있는 진희와 진수도,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것 같은 기열이도 안쓰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 자신이 자격미달이라는 걸 미숙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근데 어쩌다가 몸도 성치 않은 애를 시골에 맡기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걱정을 하기에 자신은 자격 미달이었다. 미숙은 꼭 텅 빈 운동장에서 바람에 휩쓸리는 까만 봉지가 된 기분이었다. 150쪽
미숙은 기열이가 던진 돌에 맞아 허리를 삐끗한다. 그 바람에 호태네 엄마에게 간호를 받게 되고 정체가 들통 나고 만다. 그런데 오히려 비밀을 훌훌 털어 버리자 머리도 마음도 가뿐했다. 하지만 자신을 “애 버린 여자”라고 말하며 가시를 세우는 진수와 한영에게 “도대체 왜 나를 낳을 거야?”라고 말하는 기열이를 보면서 미숙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정말 이렇게 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한참 뒤, 미숙은 기열이 있었던 개울가로 걸어갔다. 어쩌면 기열은 이 개울가에서 아픈 마음을 달래고 갔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까만 개울에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미숙은 두 손 모아 그 별을 떴다. 손바닥에 뜬 별이 흔들렸다. 미숙은 그 별을 얼굴에 끼얹었다. 얼굴에 별이 조롱조롱 매달렸을 거였다. 별은 어두컴컴한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반짝반짝 불을 켜는 것 같았다. 171쪽
미숙은 민박집에 온 뒤 처음으로 청소를 한다. 그리고 개울가로 가서 얼굴을 물에 담갔다. 얼굴에 아니 머릿속과 가슴속에 묻어 있던 때가 말끔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염치없지만 인생 2막을 기대하고 싶었다.
늘 흙탕물만 흐르던 마음속 개울물이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몸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흠뻑 젖은 얼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 살 것 같다.” 미숙은 기분이 산뜻했다.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었다. 문득 한영과 호태한테도 이 느낌을 선물하고 싶었다. 176쪽
“그냥 아프기만 한 건 아니야! 더 단단해질 테니까!” 느티말 아이들이 선사하는 치유와 위로의 삼중주! 《주병국 주방장》《똥배 보배》 등 아이들의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각과 동화의 상투성을 벗어던진 이야기 전개로 주목받아 온 정연철 작가의 새로운 장편 동화가 출간되었다. 《속상해서 그랬어!》는 가정의 붕괴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아이와 어른들이 두메산골 느티말에서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가는 연작 동화로, 아이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어른들의 삶까지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이야기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삼 년 전 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 맡겨진 진수, 아토피를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온 기열, 빚쟁이를 피해 느티말로 숨어 든 미숙 등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두메산골 느티말에 오게 된 세 주인공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면서 가슴 따뜻한 치유와 위로의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어린이 책에서 가정의 문제로 아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은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많은 책들이 어른들의 도움이나 화해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다소 뻔한 결말을 보여 준다. 반면에 이 책은 어떤 해결책이나 큰 변화를 보여 주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느티말에서 만난 사람들과 부딪치고 깨지고 넘어지면서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경험을 통해 조금씩 치유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특히 엄마 아빠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새빨개지는 진수나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친구들과 잘 지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못되게 구는 기열이 등 자신의 아픔을 애써 숨기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아파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해지는 깊은 울림이 있다. 사실 답답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무턱대고 긍정적이고 밝거나 반대로 한없이 움츠러들기만 하는 모습은 실제 우리 아이들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쓰지만 그 모습 자체가 지독하게 아파하는 거며 그렇게 아파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가는 게 우리 아이들 스스로 가장 공감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 책은 현실 속 우리 아이들과 꼭 닮아 있는 주인공들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깊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한다. 또한 앞뒤 상황 파악 못 하고 감자 하나에 행복해하는 철없는 두호나, 사랑 받고 싶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늘 삐딱하기만 한 까칠 대마왕 기열이 등 아이다운 발랄함이 가진 톡톡 튀는 캐릭터들을 통해 시종일관 밝고 유쾌하다는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울퉁불퉁 돌 같은 마음을 돌돌 어루만지는 개울물 같은 이야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깨진 돌, 울퉁불퉁한 돌, 뾰족한 돌 같은 모난 구석과 상처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 〈나무 배〉의 진수는 삼 년 전 집을 나간 엄마와 느티말 할머니 집에 자신과 동생 진희를 맡기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아이다.
난 진희가 엄마 아빠 얘기를 꺼낼 낌새만 보여도 윽박지른다. 자꾸 그러면 다시는 너하고 안 놀 거라고. 말도 안 할 거라고.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겨우겨우 참고 있는 거니까. 본문 12쪽
두 번째 이야기 〈나무 물고기〉의 기열은 시골 공기가 아토피에 좋다는 이유로 할머니 집에 내려왔지만 사실은 엄마 아빠가 자신 몰래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이런 현실이 짜증나고 우울한 기열이는 전학 간 학교에서 그야말로 ‘못돼 처먹은’ 아이가 된다.
“미, 미안. 내가 고쳐 줄게.” 진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네까짓 게 어떻게 고쳐. 병신 같은 게.” 애들이 멀찍이 떨어진 채 구경하며 소곤닥댔다. “야, 니 좀 심한 거 아니가?” 승미가 팔짱을 낀 채 끼어들었다. (중략) “좋아, 그럼 고쳐 줘. 흠집 하나 없이. 고칠 때까지 내가 자전거 못 타는 것도 보상해 줘. 너희 둘! 사람 잘못 봤어.” “잘못 보긴 뭘 잘못 봐. 머시마 니 못된 아라는 거 니만 모르고 전교생이 다 알걸.” 본문 93~94쪽
세 번째 이야기 〈나무 새〉의 미숙은 빚쟁이들의 끈질긴 괴롭힘을 피해 느티말에 숨어든다. 하지만 어릴 적 친구들의 아들딸인 진수와 진희, 그리고 기열이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자신도 몇 년 전,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무작정 엄마에게 맡기고 한 번도 찾지 않은 어린 딸 희주가 있기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문득 미숙은 희주가 떠올랐다. 많이 자랐을까? 아픈 데는 없을까? 오 년 전 친정 엄마한테 무작정 맡겨 두고 여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희주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악착같이 버텨 오던 삶의 기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명절 때마다 옷을 사서 부친 게 엄마 노릇의 전부였다. 삼 년 정도만 맡기고 데려가려던 목표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36~137쪽
하지만 이 책은 낙관적인 상황의 변화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수는 이제 곧 다가올 추석에도 아빠가 오지 않으리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듣게 되고, 기열은 결국 엄마 아빠의 이혼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며, 미숙은 느티말에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 마음 편히 잠들 수 없다. 대신 이 책은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속에서 돌돌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깊이 있게 마주하고 차분히 들여다보는 마법 같은 치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다음부터 개울가는 언제나 나한테 약국이다. 개울이 주는 진정제는 효과가 뛰어나다. 개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곤두박질치던 내 기분도 어느새 돌돌 차분해진다. 12쪽
어느새 가려움증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펄펄 끓었던 몸도 시원하게 식었다. 그 순간 신기하게 개울물이 품을 열어 나를 폭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아토피 피부염을 가진 나를, 성질도 못되고 버르장머리도 없는 나를,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사는 나를…….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물속에 얼굴을 담갔다. 개울물이 내 눈물을 씻어 주었다. 본문 117쪽
미숙은 쪼그려 앉은 채 허리를 굽혀 개울에 얼굴을 담갔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얼굴에 아니 머릿속과 가슴속에 묻어 있던 때가 말끔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늘 흙탕물만 흐르던 마음속 개울물이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176쪽 마음의 상처가 곪는 이유는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나서 한결 여유로워지고 부드러워진 진수와 기열, 그리고 미숙을 통해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 또한 만나기만 하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던 진수와 기열이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 문을 열고, 딸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미숙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도 감싸 안을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 준다. 돌돌 흐르는 개울물 같은 치유의 힘이 있는 이 책이 우리 아이들 마음속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좋은 연고가 되어 주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