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궐에서는 사람 죽이는 일을 떡 먹듯 한다고 했다. 왕비가 시앗을 죽이는 일은 예사로운 일이라고 했다. (중략) 어느 날 밤, 그 궁녀는 같은 궁녀들에 의해 자기 거처에 갇히고, 그 방에는 밤나무 장작을 땐 이글거리는 화롯불이 들여지고, 조갈이 나면 마시라는 찻종이 준비되고, 그래서 그 궁녀는 밤나무 장작이 내뿜는 가스에 중독되고, 이상한 약이 든 차를 마셔 사지가 마비되고 ……
“울아부잉교?”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 양사골 대감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내 신분을 일러줬다. “네 아버님은 태황제 그 어른이시다. 나는 그 어른의 사촌이구.” 그분은 별안간 하대말을 썼다. “너는 일본에 가 계시는 영친왕(英親王)과 이복동기야.”
빨래하기를 제일 좋아했다. (중략) 이틀도 채 안 입은 옷을 양잿물에 삶아 빨래 방망이로 짓이겨대곤 했다. (중략) 물레질이나 바느질은 너무 안존하고 찬찬한 일이라서 백 갈래 천 갈래 뒤얽히기만 하는 거의 회한투성이의 잡념만 기르는 것임을 경험해왔다.
“……아버지는 제왕인데 딸은 거렁뱅이로 출발합니다. 한 여인은 한 생명을 낳았다는 업보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환경의 지배를 받긴 합니다만, 이 여사는 정치악과 인간악의 소용돌이 위에 맴도는 허망한 거품이 되어 가장 비정적인 여자의 일생을 살고 계십니다. (중략) 이 여사님을 작품으로 쓰고 싶은 것입니다. 허락해주실 수 있겠지요?” 이광수 그분은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
며칠 후 나는 서울로 압송돼 왔고 서울에서의 임시 주소는 서대문 감옥으로 결정이 됐다. 병원엔 병자가 많은 것처럼 감옥에 들어가 보니 죄진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엔 죄 없는 사람들도 꽤 섞여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방자 여사는 첫눈에도 내가 부군 영친왕을 쏙 빼놨다면서 기구한 운명을 살고 있는 두 시뉘올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낙선재로 들어오셔서 함께 사시지요?” “안 들어갈래요. 비전하, 저는 오늘날까지 혼자 굴러다닌 인생인걸요.” 옆에서 면용 동생이 조심스럽게 간권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누님. 비전하의 어지신 호의이신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딴소리를 했다. “덕혜 옹주의 병세는 좀 어떤가요.” 나의 물음은 허공을 맴돌다가 스러질 뿐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나보다 꼭 열한 살 아래인 이복동생 덕혜 옹주를 한번 만나보고 싶지만 서로 마음만 상할 듯싶어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덕혜의 생모는 양 상궁, 같은 귀현의 피를 받았으면서 그쪽은 등록된 옹주고 나는 버림받은 생명이며, 그쪽은 산송장 같은 등신이 돼 있고 나는 지금 이 꼴이니 몰락한 왕가의 후예들은 이처럼 처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