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나오니 로랑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식탁이 깨끗하다. 사무실에서 종일 컴퓨터를 마주하다가 집에 돌아와 맨 먼저 하는 일이 다시 컴퓨터라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집을 나서야 한다. 나는 벽장에서 요깃거리를 대충 집어 들고서, 컴퓨터 모니터에 넋을 빼앗겨 눈빛이 멍해진 로랑의 볼에 키스한 뒤 집을 나왔다. 메일을 확인할 때면 로랑은 업어 가도 모른다. 확인이 끝나면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틀림없이 몇 시간이고 전쟁 게임에 빠져들 터였다. --- p.20
병실로 들어가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 소녀가 의자에 못 박힌 채 소방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참상이 자기의 가냘픈 어깨에 얹혔다는 듯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아니면 어쩌면 너무 빨리 자라버린 몸을 웅크림으로써 달아나려는 유년 시절을 붙들어 매두려는 걸까. 소녀는 문을 등지고 앉아 있다. 소녀의 발치에 놓인 이스트팩 배낭엔 털 인형 열쇠고리 세 개가 지퍼마다 각각 매달려 있다. 길을 걸을 때마다 털 인형들이 흔들릴 테고 이 또한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며 소녀를 안심시킬지도 모른다. --- p.45
젠장! 망할! 우리 오빠 어떡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오빠라는 걸 알았어, 어깨에 새겨진 문신을 봤거든. V자를 에워싼 작은 꽃 세 송이를. V는 바네사의 V야. 2년 전에 우리가 대판 싸운 뒤 오빠가 날 버리고 잊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자 안심시키기 위해 문신을 했지. 하지만 그밖에는...... 아무나 데려다놨더라도 난 오빠인 줄 알고 속아 넘어갔을 거야. “안녕, 학생, 이 사람이 당신 오빠예요”, 그들이 퉁퉁 부어오른 미라 앞에 나를 데려다놓고서 이렇게 말했어. 문신 만세! 오빠도 이젠 내가 문신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오빠 같은 꼴을 당하면 이런 식으로라도 쓸모가 있을 거 아냐. --- p.58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응, 병원에 심각한 환자들이 있긴 하지만 재미있는 일도 있어.” “맥주 없어?” “응, 장 볼 시간이 없었어.” “넌 정말 너랑 네 일이랑 환자밖에 생각 안 하는구나.” “미안해. 다음 번엔 신경 쓸게.” “오늘 하루 힘들었어. 은행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내가 다 일일이 챙겨야 한다고! 주위에 무능한 인간들뿐이라...... 오직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실 생각으로 집에 왔는데 없다니.” “내가 저 아래 식료품점에 가서 사올까? 거긴 저녁 8시까지 열어.” “아냐, 됐어. 다른 걸 마실게.” 빠르고 간략하고 거친 부둥킴, 이걸로 저녁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단지 마시지 못한 맥주 생각에 욕구를 분출한 듯한 느낌이다. --- p.79
부모님은 식당 일에 치여 나의 감정이나 실존적 문제를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나중에 고생하지 않도록 바른 길로 나아가기만을 원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기를, 너무 일찍 남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를, 좋은 인연을 만나 당신들을 부모의 책임에서 영원히 해방시켜주기를. 나는 그렇게 했다. 복종했다. 바른 길로 나아갔고, 모범생이었으며, 남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생을 물질적 결핍 없이 지내게 해줄 남자를 찾아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사는 것처럼 산 걸까? --- p.153
나는 불편해진 기분으로 차에 앉아, 로랑이 집까지 올라와 의상에 대해 요구 사항을 말하든가, 어차피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면 지적질을 삼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저녁 내내 사람들이 행여 내 엉덩이를 보게 될까 봐 염려하며 어떻게든 몸을 숨길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의자에 붙어 앉아서.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이의 입에서 넘쳐나던 모든 칭찬은 이제 먼 옛날의 추억거리일 뿐이다. --- p.170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제 시간에 찾아드는 법이야.” “그래도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온통 기다리며 보낸 건 너무하지 않아?” “그럼 다음 생에는 당신이 배우게 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보상받아.” “내 다음 생에도 당신이 곁에 있어줄 거야?” “당연하지!” --- p.213
“왜냐하면 난 여자애들이 지긋지긋하거든. 샤를로트하고 두세 명만 빼놓고. 여자애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노상 투덜거려. 이를테면 교내에서 제일 싫어하는 여자애가 자기랑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든가, 매니큐어 칠에 기포가 생겼다든가, 반에서 일등이 아니라든가, 생리통이 심하다든가 하는 것들로. 여자애들한테는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악독하고 앙심을 품거든. 난 남자애들이랑 함께 있는 게 편해. 여자애들과 달리 이해하고 이해받는 기분인 데다, 잘 투덜거리지도 않고 혹시 투덜거린다 해도 이유가 덜 바보 같아.” --- p.281
그중에 유난히 심하게 요동을 치는 놈이 있으면 아저씨가 곤봉으로 대가리를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 기절시켰다. 내가 결코 좋아해본 적 없는 장면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꺼림칙하다. 나 자신이 한 남자에게 수년 동안 몽둥이질을 당한 물고기였던 기억이 떠올라서이리라. 양동이 속에 갇힌 얼빠진 물고기. 죽지 않기 위해 약간의 공기를 찾아 입을 헤 벌린 포로. 나는 셀레스틴 덕분에 마지막으로 펄쩍 뛰어올라 양동이에서 빠져나왔고, 나 자신을 구했으며, 나를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해준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늘 아침,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서 다시 숨을 쉰다. 알렉상드르를 되찾고, 다시 숨을 쉰다. 알렉상드르와 아저씨와 함께 호수로 나와 다시 숨을 쉰다. 나는 과거에 대한 혐오감에 소리 죽여 울었다. --- p.304-305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줄리에트? 왜 떠나지 않았어?” “그 사람의 위협이 겁났어.” “그렇게 되기 전엔 왜 떠나지 않았는데?” “그전엔 친절했거든.......” “그럼 덜 친절하다고 느꼈을 때는?” “그땐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웠어.” “함께 있어서 행복하지 않다면 차라리 혼자가 나아.” “혼자가 된다는 생각을 못 견디겠더라고.” “그 인간이 못되게 구는데도?” “못되게 군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너무 늦었을 때란 결코 없어.” --- p.346-347
난 내 행동이 부끄럽지 않아, 그건 정당방위였으니까. 그는 평생을 나를 협박하면서 살았으니까. 만일 내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면, 그런 삶을 비겁하고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것을 부끄러워해야겠지.
--- p.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