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 탄 뒤의 재와 꽁초는 마치 허물어진 파르테논 신전의 폐허에 서 있는 돌기둥들처럼 인간의 야심과 의지와 상상력의 폐허이다.
--- p.17
1965년 이후 나는 시라는 것을 쓰고 있는데, 아마 내 육체 속에는 저 감동적인 하품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냇가의 달빛과 그것이 그 물기 있고 고요하고 환하고 흐릿한 빛 속에 빨아들이고 있었던 기성과, 사람과 세상의 일에 대한 오리무중의 신비감이 만든 그리움(또는 그리움이 만든 신비감) 따위들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과 더불어 뒤범벅이 되어 들어 있을 것이다.
--- p.25
이 숲에서 나는 돌 하나를 던진 적이 있다. 숲 위쪽에서 던진 돌은 저 아래 어디엔가 떨어졌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지구 무게만 한 어떤 느낌이 마치 지진처럼 내 속으로 지나가는 걸 느꼈다. 즉 내가 방금 던진 돌, 나에 의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진 돌로 우주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내가 던진 돌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꾼다!
--- p.32~33
건드리기만 하면 과거의 앙금은 언제나 그 가라앉은 상태로부터 피어오른다. 건드리면 금방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뜨고 있는 과거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과거의 앙금은 ‘피어’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꽃처럼 피어나는 과거, 왜 과거가 꽃처럼 피어나는가. 내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피어나기를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이 새날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하여 현재가 피어나기를 기다린다. 나는 내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를 기다린다. 나는 현재를 기다리고 있다.
--- p.45~46
체험이 대단히 중요한 몫을 하는 명상의 공간이 있는데, 그게 시라는 것이다.
체험 없이는 시가 추상적인 게 되어 버린다. 모든 체험은 원래 가치중립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이 예술 작품의 재료가 되고 그 밀도를 결정할 때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다만 ‘본다’는 것은 예술 창조에도 매우 중요하다. 체험이 작품을 낳으려면 자기의 체험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다르게 하는 것이겠지만, 기억이나 과거도 문학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게 아니라 체험, 기억, 과거 없이는 도대체 문학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문학의 경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 기억, 과거가 문학 작품으로 변하는 순간 그는 그것들에 대해 죽는 것이라고.
--- p.75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때도 많이 묻고 거짓에 물들어 있기도 하다. 말은 다름 아니라 그것(말)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의 거리를 나타낸다는 게 말의 불가피한 한계이다. 그리고 말의 이러한 모습들에 절망한 사람들이 침묵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에게 미덕이 있다면 ‘침묵으로서의 말’을 하려고 하는 데 있다. 그의 말은 관념적 논리나 개념화하고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그냥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런데 문학에서 침묵에 가장 가까운 말이 시이다. 말하자면 말이 배제되지 않은 침묵(명상)의 공간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의 공간은, 너무 높아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 p.76
매미 소리 없이도 여름은 오고 또 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무딘 사람이다. 매미 소리는 지금 우주를 수렴하고 있고 우주의 중심은 매미 소리이다. 그 매미 소리의 융단 폭격 아래로 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간다. 고양이가 지나가지 않아도 지구는 돌아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고양이의 조용하고 한가한 움직임 속에 우주가 수렴되고 그게 움직이는 데 따라 우주의 중심이 이동한다.
우주의 중심은 많고 많다
--- p.120
나무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상승 이미지/관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 p.133
가벼워지려는 본능, 도약하려는 의지가 낳은 게 ‘바람’과 ‘춤’일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바람(공기)은 우주와 생물을 구성하는 원소들 중 그 가동성(可動性)에서 제일가는 것이고, 춤은 순간순간 추락을 극복하면서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러니까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불꽃을 부추겨 타오르게 하는 바람은 우리 몸속의 불꽃과 정신 속의 불꽃도 부추겨 타오르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다. 기상(氣象)의 변화가 우리의(모든 생물의) 마음에 일정한 영향을 준다는 건 다 아는 얘기지만, 바람이 불 때, 미풍이 불 때, 미풍만큼 태풍이 불 때는 태풍의 강도만큼의 변화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다.
--- p.149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사물들 중에 음악적으로 변역(變易)되고 설명되지 않는 게 없다고 할 만큼 우리는 거의 모든 사물에서 리듬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우주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필경 음악적으로 움직인다. 천체의 운행과 시간의 흐름, 그에 따르는 계절의 변화와 밤낮의 바뀜, 그리고 그러한 변화와 함께 진행되는 우리 몸과 마음의 변화…… 그 모든 움직임은 리드미컬하다.
--- p.174
되풀이하자면 서로 다른 두 사물이 만나는 접점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은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엄청난 물건들이다. 바다와 땅이 만나는 해변, 물과 공기가 만나는 파도 같은 것들도 그렇다. 그것들은 우리의 그리움의 표상이며 낭만적 상징물들이다. 하늘과 땅,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의 팽팽하고 하염없는 긴장은 우리의 꿈과 열망의 표상이다. 지평을 연다는 말은 그러므로 아주 좋은 말이다.
…(중략)…
모순은 우리의 삶의 구조이다. 사회 현실의 모순, 문학이 갖고 있는 모순, 우리 마음의 모순……. 그리고 문학의 자리에서는 이 모순이 앞에서 얘기한 박명의 시공 속에서, 지평선의 모습으로 만나기를 우리는 바란다. 위대한 영혼이란 한 시대의 모순과 인간의 삶의 모순들이 부딪치는 자리에 다름 아니다. 모순들은 그를 통해서 극복되고 화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이상하게 기쁜’ 것이다. 이 ‘이상한 기쁨’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p.213~214
다시 말해서 나는 살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잘 모른다.
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를 잘 알고 있었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다만 확실한 건 내가 시 쓰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러나 한참 안 쓰면서도 지나치게 느긋하다고 할 만큼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건 물론 게을러서 그런 것이지만 언필칭 시가 익어 터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는 것, 무슨 물건 주문 생산하듯이 손에 익은 재주 가지고 적당히 그럴싸하게 찍어 내는 건 상당히 싫어한다는 것, 늘 하는 얘기지만 시 쓰기가 어려운 건 에누리 없이 자기가 산만큼 쓰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는 것 등이다.
--- p.240
그리고 그 새벽의 빛과 새를 나는 지금 은유로 읽으려고 한다. 시의 언어는 말하자면 그 빛이나 새와 같은 것이다. 시는 바로 빛 ― 언어이며 깃 ― 언어이다. 되풀이할 것도 없겠지만, 사물을 새벽의 여명처럼 창조하는 말, 끊임없는 시작으로서의 말, 빛 속에 떠오른 하얀 숲길 위에서 날아오른 그 새처럼 무겁고 무거운 걸 가볍게 들어 올리는 말 ― 시는 그러한 말이며,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