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규칙을 만들고 유지하는 시도가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여덟 가지 확실한 길들이 존재하는 셈이다. 첫째, 실패로 가는 가장 뚜렷한 길로서 규칙이라는 것을 전혀 이루지 못해 모든 쟁점들이 그때그때 즉석에서 마련된 근거에 의해 해결되는 길이다. 둘째, 관련 당사자에게 그가 따르도록 되어 있는 규칙을 공포하지 않거나 혹은 적어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길이다. 셋째, 소급입법을 남용하는 길이다. 소급입법은 그 자체가 행위를 인도하는 규칙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소급적이지 않은 규칙의 효력까지도 훼손한다. 왜냐하면 비소급적인 규칙마저도 소급적인 변화의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규칙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길, 다섯째, 상호모순되는 규칙을 제정하는 길, 여섯째, 관련 당사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행동을 요구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길, 일곱째, 규칙을 너무 자주 바꿈으로써 수범자로 하여금 규칙을 자기 행동의 지침으로 삼을 수 없게 하는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포된 규칙과 그 실제 집행이 일치하지 않게 내버려 두는 길.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길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그 실패가 전면적인 것일 때, 그것은 단순히 나쁜 법체계뿐만 아니라 도대체 법체계로 일컬을 수 없는 것을 낳게 된다.--- p.70
이제 이것들에 상응하여, 규칙 체계가 이루고자 노력하는 법적 탁월함의 여덟 가지 종류가 있게 된다. 이는 그 가장 아래 단계에서는 법이 적어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조건들로 나타나지만, 성취의 규모를 키워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우리 인간 능력에 크나큰 도전을 요구하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성취의 정점에서 우리는 정녕 법의 법다움이라는 의미에서의 합법성legality의 유토피아, 즉 모든 규칙들이 완벽히 명확하고, 상호 간에 모순이 없고, 모든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고, 결코 소급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를 생각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 안에서 규칙들은 일관되고 가능한 것만을 명하며, 법원과 경찰, 그리고 법집행 임무를 맡은 모든 공직자들에 의해 세심하게 준수된다. 곧 그 이유를 말하겠지만, 법을 법답게 하는 데 필요한 여덟 가지의 원칙들이 모두 완전히 실현되는 이 유토피아가 사실 합법성을 향한 열망을 인도하는 데 아주 훌륭한 과녁은 아니다. 왜냐하면 완벽함의 목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합법성에 있어서 뛰어남을 가늠할 수 있는 여덟 가지 분명한 규준들을 시사한다.--- p.73~74
법의 내적 도덕성이 요구하는 바는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법의 내적 도덕성 자체는 의무를 통해 실현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추구해 가는 것이 그것 자체로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그것이 의무라고 주장할 때는 우리는 그 의무 위반의 한계를 정해야 한다는 책임을 안게 되는 것이다. 입법자에게 법률을 명확하고 알기 쉬운 것으로 만들 도덕적인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입법자가 과연 법률을 어느 정도로 명확하게 만들어야만 그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 그 명확함의 정도를 우리가 뚜렷이 밝힐 수 없다면, 이 말은 기껏해야 권고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서 이르게 되는 결론은, 법의 내적 도덕성은 대체로 의무의 도덕이 아니라 열망의 도덕으로 선고된다는 것이다. 그것의 최초 호소는 신뢰감에 그리고 장인의 긍지에 향해 있음이 틀림없다.--- p.75~76
법의 내적 도덕성 원칙들로부터의 모든 이탈은 책임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의 행위를 공포되지 않은 법률 혹은 소급입법에 따라 판결하거나 불가능한 행위를 명하는 것은 상대의 자기결정 능력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에게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진다면, 법의 도덕성은 그 존재 의의를 잃게 된다. 이 경우 인간의 행동을 공포되지 않은 법률이나 소급입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이미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아니, ‘판단한다’는 동사 자체가 이 맥락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한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단지 실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p.230~231
법을 오로지 권위의 형식적인 원천으로 여기지 않고 법을 유지해 나가는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은, 때로는 언어를 그 통상적인 기대에 어긋나게 사용한다는 느낌을 줄지 모른다. 내 생각에 이런 불편감은 우리로 하여금 그 본질적인 유사함을 감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입장의 수용력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입장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노동조합이나 대학 안에서 불완전하게 달성되는 법체계들이 왕왕 법원의 그 어떤 판결보다도 더 깊이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다른 한편 이 입장은 크고 작은 모든 법체계가 동일한 허약함에 노출된다는 점도 알게 해 준다. 어떠한 경우에도 법적 성취는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가진 통찰력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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